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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26 [독후감] 재미이론 (21)

[독후감] 재미이론

라프 코스터(Raph Koster)의 "재미 이론"을 읽었습니다. 원제는 "게임 디자인을 위한 재미 이론(A Theory of Fun for Game Design)"이라고 하는군요.



2~3년 전에 한 번 읽었던 책인데, 최근에 게임에 관심이 생겨서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1. 제목에 대하여

미학(aesthetics)을 다루는 책의 제목이 "예술가를 위한 예쁨이론(A Theory of Pretty Beauty for Artists)"이라면 뭔가 좀 부적절하다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예술이란 단지 예쁘게 그리는 것이 다는 아닐테니까요.

저는 이 책의 제목에서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게임 기획(game design) 이론을 다루는 책의 제목으로 "재미 이론"을 선택한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게임이란 단지 재밌는 것이 다는 아닐테니까요.

특히 게임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저자의 뜻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죠. 저자는 본문 곳곳에서 게임이 "그저 재미로(just for fun)", "이건 단지 게임일 뿐이잖아!(it's just a game!)" 같은 식으로 인식되는 것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종류의 게임이 있고, 사람들이 게임을 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재미(fun)"라는 것은 그 중 하나일 뿐이죠. 이 단어가 주는 느낌이 왜 제한적인가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비유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이유는? 어떤 사람은 공포감을 맛보려고, 어떤 사람은 잔잔한 감동을 느끼려고, 어떤 사람은 로멘스를 느끼려고 영화를 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재미를 느끼려고"라는 포괄적 표현으로 대체할 수도 있지만, 일상에서 누군가가 별 부연 없이 "이거 재밌는 영화야"라고 소개한다면 이를 듣는이는 대부분 액션이나 코메디 같은 장르를 떠올릴 것입니다.

물론 저자는 재미라는 단어를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 재미라는 단어를 지루함의 반대말로 쓰고 있는 점(p56)
  •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지능 이론을 끌어쓰며 사람마다 재미있어 하는 게임의 종류가 다를 것이라고 주장하는 점(p114)

등을 볼 때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재미를 어떠한 식으로 정의하고 있는지는 책을 꼼꼼히 읽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죠. 그런 의미에서, 책 제목을 지을 때 적절한 단어를 찾기 위한 고민을 조금 더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게임 이론 - Game Theory - 이라고 했으면 참 좋았겠지만 이건 이미 경제학 분야에서 수십년 전부터 널리 쓰이는 용어라서 좀 곤란하죠. ㅎㅎ)


2. 재미란?

이 책에서 일관적으로 주장하는 바를 요약하자면

  1. 사람들은 무언가를 학습하면 재미를 느낀다.
  2. 사람들이게 지속적으로 학습할 거리를 제공하는 게임이 재미있는 게임이다.

입니다.

Tic-Tac-Toe 같이 너무 쉬운 게임은 그 규칙을 너무 빨리 배울 수 있기 때문에 (학습이 일어나는) 처음 몇 판 동안만 재미있고 그 이후엔 지루해집니다. 한편, 과도하게 어려운 게임 혹은 너무 급속하게 난이도가 높아지는 게임은 오히려 학습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재미가 반감되고 사람들은 게임을 포기하게 됩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학습이란 개개인이 의도적으로 "나는 이제부터 학습을 할테다"라고 마음먹어서 일어나는 학습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자는 우리가 게임을 하는 동안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게임에 내제된 패턴을 찾아내는 과정을 겪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뇌의 변화가 바로 학습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자는 "모든 게임은 에듀테인먼트이다"라고 선언하고 있고(p61), 게임을 제작하는 사람은 교육자(p60)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관점에서 재미있는 게임이란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난이도의 학습 거리를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게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학습 거리란 것은 적극적으로 밝혀내야만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게임 내에 숨겨진 수학적 패턴을 의미합니다.

3. 게임의 핵심은 수학적 형식성인가?

저자는 게임의 핵심 혹은 본질은 수학적 형식성에 있다고 말합니다. 본문의 일부를 인용하겠습니다.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지금 당장은 게임에 대한 이해가 가장 부족한 부분이 게임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게임의 형식인 추상 시스템이자 게임의 수학적인 측면이라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바로 이러한 게임의 형식적인 측면을 개발해야만 게임이 근본적으로 개선될 수 있다는 명제를 잊지 않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시급하다. --p98

재미의 본질:

... 재미란 학습을 목적으로 패턴을 흡수하고 있을 때 두뇌가 보내는 피드백이다. ... 게임은 이야기가 아니며, 아름다움이나 환희에 대한 것도 아니다. 게임은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한 책략에 대한 것도 아니다. ... 재미의 본질은 압박이나 압력이 없는 환경에서 '학습'하는 것이며, 게임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p110~112

게임의 재미를 엄격하게 테스트하는 방법:

게임의 재미를 엄격하게 테스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래픽, 음악, 사운드, 스토리 및 그 밖의 모든 것이 배제된 상태에서 그 게임을 해 보는 것이다. 그것이 재미있다면 나머지 모든 요소들은 게임에 중심점을 부여하고, 세련되게 만들고, 더 멋지게 하고, 더 풍부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세상의 어떠한 양념도 양상추를 칠면조 바베큐로 바꿀 수는 없다. --p180

저는 저자가 게임의 형식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최근 출시된 게임인 페르시아의 왕자 4에 서 전체적인 시나리오, 왕자와 엘리카가 주고 받는 감칠맛 나는 대화, 그 사이에 오가는 미묘한 감정들을 다 빼버리고 "길 찾기", "타이밍에 맞춰 버튼 누르기", "퍼즐 풀기"라는 형식만 남긴다면 게임의 재미는 크게 반감될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일인칭 슈팅 게임(FPS) 장르의 대중화에 기여한 울펜스타인 3D 및 둠 시리즈의 추상적 형식은 2D 미로찾기 입니다(멀티플래이를 하지 않는 경우라면). 실제 엔진도 울펜스타인 3D, 둠1, 둠2의 경우 2D로 구현되어 있고 단지 랜더링만 3D로 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뻔한 형식을 얼마나 현실감 있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게임의 재미는 크게 달라집니다.

이런 예는 수도 없이 찾을 수 있습니다:

  • 육성 혹은 생활 시뮬레이션에서 그래픽과 시나리오가 빠진다면? (프린세스 메이커, 심즈)
  • 리듬 액션 혹은 댄스 게임에서 음악이 빠진다면? (DDR, DJ Max, 러브비트)
  • ...

이러한 이유로 저는 "게임의 본질이 수학적 형식성에 있고 나머지도 중요하긴 하지만 양념에 불과하다"고 하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관점은 게임이 주고 있는 혹은 줄 수 있는 재미의 많은 부분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MMORPG 장르에 대한 비판 중 일부는 몇몇 게임이 형식성만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게임 내에서 "시나리오나 맥락이 없고 지루할 뿐인 단순 반복"이 일어날 때 "닥사(닥치고 사냥)"나 "노가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MMORPG의 MMO(Massive Multi-user Online)는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연결되어 게임을 함께 즐긴다는 의미이고, RPG(Role-Playing Game)은 역할 놀이를 한다는 의미인데, RPG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 게임 내에서 제시하고 있는 캐릭터의 역할에 얼마나 충실히 몰입할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탄탄한 시나리오와 대사, 상황에 맞는 목소리 연기, 시나리오와 상황에 어울리는 맵의 구성과 레벨 디자인, 충분히 다양하면서도 시나리오 전개와 긴밀하게 연결된 퀘스트와 미션 등등의 다양한 요소가 만족되지 않고 단순한 형식만 남을 때 "닥사" 내지는 "노가다"로 인식되는 것이죠.

(물론 밖에서 보면서 이런 식으로 비판하기는 참 쉬운 일입니다.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많은 이유가 있겠죠. 일정이라거나 예산이라거나 조직 구조라거나 등등)

정리하자면 저는 게임의 형식성, 시나리오, 대사, 레벨 디자인, 그래픽, 조작감, 인터페이스, 사운드 효과 및 배경음악 등이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배경음악이라는 말 자체에 약간 편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게임에서의 음악은 배경음악이 아니라 전경음악이라고 해야 합니다. 앞서 예로 들었던 리듬 액션 게임이 대표적인 예죠. 스타워즈 X-Wing 시리즈나, 실시간 전략시뮬레이션(RTS)의 원조격인 듄(Dune) 등은 전장(field)의 상황에 따라 음악이 바뀝니다. (배경)음악은 게임의 진행 상황과 능동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 주요한 요소입니다.

요약하자면 게임의 장르나 특성에 따라 강조해야할 요소가 달라지는 것이지, 형식성을 우위에 놓고 나머지를 양념으로 잘 버무린다는 개념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4. 맺음말

좀 비판적으로 읽기는 했지만,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는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놀이와 인간, 호모 루덴스 등에 1900년대 초중반에 쓰인 책들에 비하면 이 책이 실무를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저는 게임 제작 관련 실무를 하지 않기 때문에 추측일 뿐입니다만) 훨씬 구체적으로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래도 여전히, 학계가 아닌 업계에 있는 사람(저자는 소니 엔터테인먼트의 CCO - Chief Creative Officer - 라고 합니다)이 쓴 책 치고는 좀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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