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들어진 신 요약

Engardo Mortara

Edgardo Mortara는 유태인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6살 때 강제로 - 하지만 합법적으로 - 로마로 끌려가서 가톨릭 신자로 키워졌습니다. 다음은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서 요약한 내용입니다:
19세기 이탈리아에서 있었던 한 사건으로부터 시작하자. (...omitted...) 1958년 볼로냐에서 유대인 부모와 함께 살던 여섯 살짜리 에드가르도 모르타라가 종교 재판소의 명령을 받은 교황청 경찰에 의해 합법적으로 강탈당했다. 모르타라는 흐느끼는 어머니와 망연자실한 아버지에게서 강제로 격리되어 로마의 교리문답생(유대인과 이슬람교도 중 개종한 사람들이 들어가는)이 되었고, 그 뒤로 로마가톨릭교도로 성장했다. 그의 부모는 사제들의 엄중한 감시하에 잠깐 면회하는 것 외에는 자식을 만날 수가 없었다.

(...omitted...)

모르타라의 일화는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결코 특이한 것이 아니었으며, 사제들이 유괴를 한 이유는 언제나 같았다. 그 아이들은 모두 이전에 몰래 세례를 받은 적이 있었다. 대개 가톨릭교도인 보모가 세례를 했고, 나중에 종교 재판소가 그 말을 듣고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아무리 비공식적이고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해도 일단 세례를 받으면 그 아이는 기독교인이 되고 그 사실을 돌이킬 수는 없다는 것이 로마가톨릭 신앙의 핵심 부분이었다. '기독교도인 아이'가 유대인 부모 밑에서 자란다는 것은 그들의 정신세계에서는 용납이 안 되는 일이었고, 그들은 전 세계의 분노에 맞서서 이 기이하고 잔인한 태도를 충실히 고수했다.

(...omitted...)

전체 가족에게 그렇게도 중요한 의식치고는 놀랍게도 가톨릭교회는 누구라도 아무에게나 세례를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지금도 그렇다). 반드시 사제가 세례를 할 필요도 없다. 아이나 부모나 다른 누군가가 세례에 동의할 필요도 없다. 서명할 필요도 없다. 공식 참관인도 필요없다. 오로지 물, 몇 마디의 말, 무력한 아기, 미신과 교리문답에 세뇌된 보모만 있으면 된다. 사실 이중에서도 특히 마지막 항목만 있으면 된다. 아기는 너무 어려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를 테니, 보모가 세례를 했다고 말하면 누가 알겠는가?

--p474~476

도킨스는 모르타라의 사례로부터 종교의 네 가지 불합리성(혹은 악덕)을 지적합니다:
이 책에서 나는 일부러 십자군 전쟁, 신대륙 정복자들, 스페인 이단 심판 같은 끔찍한 사례들은 상세히 다루지 않았다. 잔혹하고 사악한 사람들은 어느 시대, 어느 종파에나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종교 재판소와 그들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종교적인 정신과 종교적이기 때문에 빚어지는 악덕들에 관해 특히 많은 것을 상징한다.

첫째는 물을 뿌리고 짧은 주문을 외우는 것으로 아이의 인생이 완전히 바뀔 수 있다고 보는 종교적인 정신의 놀라운 사고방식이다. 부모의 동의보다, 아이 자신의 동의보다, 아이의 행복과 심리적 안녕보다, 상식과 감정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보다 그것이 우선한다고 보는 사고방식 말이다.

(...omitted...)

둘째는 사제, 추기경, 교황이 가여운 모르타라에게 자신들이 어떤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는 점이다. 다른 면에서는 분별력이 있지만, 그들은 그를 부모로부터 떼어내 기독교도로 키우는 것이 그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다. 그들은 보호의 의무를 느꼈다!

(...omited...)

셋째는 종교인들이 증거도 없이 자신들이 태어날 때 지닌 신앙이 참된 신앙이며 다른 모든 신앙은 정도를 벗어났거나 전적으로 틀렸다고 생각하는 뻔뻔함이다. (...omitted...) 모르타라 가족이 사제들의 간청을 받아들여서 스스로 세례를 받겠다고 동의만 했다면 아이를 즉시 돌려받을 수 있었다는 말을 이 자리에서 해두자. 아이는 물과 의미 없는 말 몇 마디 때문에 강탈당했다. 종교에 세뇌되어 그렇게 얼빠진 생각을 하는 정신은, 같은 일을 한 차례 더 하면 상황이 원상 복구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일부 사람들은 그 부모의 거부를 쓸데없는 고집이라고 본다. 또 일부는 원칙을 고수한 덕분에 그들이 모든 종교를 통틀어 길이 남을, 기나긴 순교자 목록에 오를 것이라고 본다. (...omitted...) 그들은 세례를 받는 동안 몰래 "아니야"라고 속삭이거나 손가락으로 가위표를 그릴 수는 없었을까? 아니, 그들은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은 (온건한) 종교 속에서 자랐기에 그 우스꽝스러운 행위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나로서는 어린 모르타라가 불쌍할 뿐이다.

(...omitted...)

넷째는 같은 맥락인데 여섯 살짜리 아이가 유대교든 기독교든,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달리 표현하면 알지도 못하고 이해도 못하는 아이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그를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단번에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불합리하다. (...omitted...) 너무 어려서 아직 생각을 할 수 없는 아이에게 어떤 신앙의 소유자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일종의 아동 학대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 행위는 거의 의문시되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p477~480

참고로, 책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모르타라는 그 후 평생을 로마 카톨릭 신자로 살아갑니다...
신고
제8장. 내가 종교에 적대적인 이유 (What's Wrong with Religion? Why be so Hostile?)

무신론자이면 그냥 혼자 무신론자로 살면 되는데, 도킨스는 왜 그렇게 열성적으로, 때론 공격적으로 유신론을 비판하는 것일까요? 8장은
  • 인권 침해(여성차별 등),
  • 광신(테러와 전쟁 등),
  • 과학 발전 저해(창조론, 비이성적 사고 강요 등) 등

종교의 해악을 이야기 합니다. 도킨스가 종교를 열성적으로 비판하는 이유들입니다.


조지 칼린

8장 머리의 글귀는 조지 칼린의 코미디에서 따온 것입니다
종교는 당신의 모든 일을 지켜보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사람은 당신이 하지 말았으면 하는 열 가지의 목록을 가지고 있다. 당신이 그 열 가지 중 어느 것이라도 하면, 그는 당신을 고문하고 고통을 주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 목이 메도록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게 할 것이다 ... 하지만 그는 당신을 사랑한다!

조지 칼린의 코메디에 대한 내용은 별도의 글로 뽑아 냈습니다.


근본주의와 과학 (Fundamentalism and the Subversion of Science)

원래 제목은 "근본주의와 과학의 파괴"입니다. 종교 근본주의로 인해 과학이 적극적으로 훼손되고 있기에 종교에 적대적이라는 뜻이죠.

일단 도킨스는 과학적 믿음과 종교적 믿음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근본주의자는 '신성한 책'에서 진리를 읽고 자신의 믿음을 뒤흔들 만한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자신이 옳다는 것을 안다 (...omitted...) 대조적으로 과학자인 내가 믿는 것(예를 들면 진화)은 신성한 책에서 읽었기 때문이 아니라 증거를 연구했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omitted...) 진화에 관한 책들은 신성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다. (...omitted...) 어느 과학책이 틀렸다면, 결국은 누군가가 실수를 발견할 것이고 그 뒤의 책들은 수정되어 나온다. 신성한 책은 그럴 일이 없다. --p427

과학철학자들이나 과학사가들은 이런 소박한 견해에 대해 할 말이 많겠지만 일단 넘어갑시다. 사실 과학자들 중에서도 특히나 도킨스는 과학을 극단적으로 소중하게 여기는데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철학자들, 특히 약간의 철학 교육을 받은 아마추어들과 더 나아가 '문화 상대주의'에 감염된 사람들은 이 부분에서 지루하게 쓸데없는 소리만 늘어놓을지 모른다. 증거에 대한 과학자의 믿음 자체가 근본주의 신앙이라고 말이다. (...omitted...) 우리는 모두 자신의 아마추어 철학이 어떠한 것이든, 자신의 삶에서 얻은 증거를 믿는다. 내가 살인죄로 기소되고 검사측이 범죄가 일어난 밤에 내가 시카고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냐고 엄중하게 묻는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철학적인 애매한 답변으로 빠져나갈 수가 없다. "그것은 당신이 말하는 '사실'이 어떤 의미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p427~428

이런 부분이 굴드(S.J.Gould) 등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입장 차이겠죠. 뭐 저도 포스트모더니즘, 극단적 상대주의 같은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도킨스는 훨씬 더 단호한 것 같다는 느낌이예요.

에, 아무튼 도킨스의 입장에 따르면 근본주의자들의 믿음과 과학자의 믿음에는 위와 같이 큰 차이가 있습니다.

도킨스가 이 절에서 말하고 싶어하는 문제는 단순한 입장 차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런 차이에서 비롯되는 더 큰 문제입니다:
과학자로서 나는 근본주의 종교에 적대적이다. 그것이 과학적 탐구심을 적극적으로 꺾으려 하기 떄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마음을 바꾸지 말고,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을 알려고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과학을 전복시키고 지성을 부패시킨다(It subverts science and saps the intellect). --p430

이러한 문제의 실례로 미국의 지질학자 커트 와이즈가 종교로 인해 과학을 포기하게 된 사례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과학적 세계관이 옳은지 알아보기 위해 성경을 펼친 뒤 말 그대로 한 구절씩 오려가면서 독파했다.

"나는 성경을 집어 들려고 했지만 온전히 남아 있는 여백의 도움을 받아도 두 장씩 집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나는 진화와 성경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성경이 옳고 진화가 틀렸든지, 진화가 옳고 성경이 틀렸든지. ... 그날 밤 나는 신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진화를 포함한, 그것을 반박할 모든 것들을 거부했다. 깊이 슬퍼하면서 나는 과학에 대한 내 모든 꿈과 희망을 불속으로 내던졌다"

나는 종교가 와이즈에게 한 짓 때문에 종교에 적대적이다. 하버드 대학교 출신의 지질학자가 그렇게 당했다면, 재능이 덜하고 대항력이 떨어지는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생각해보라.

--p431~433

성경과 진화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는 와이즈의 고민이 우습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근본주의 기독교의 교리란 그런 것입니다. 와이즈는 어떤 면에서는 참 정직한 신자인거죠...


절대론의 어두운 이면

이 절에서는 소위 "불경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비기독교 국가와 기독교 국가의 사례가 하나씩 나오는군요. 우선 비기독교 국가입니다:
구약성서에서 가장 가혹한 형벌 중 하나는 불경죄에 가해지는 것이었다. 일부 국가에서는 지금도 불경죄에 가장 심한 형벌이 가해진다. 파키스탄 형법 295-C항은 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사형에 처하라고 규정하고 있다. 2001년 8월 18일 의사이자 강사인 요니스 사이크가 불경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학생들에게 예언자 마호메트가 40세에 종교를 창시하기 전까지는 이슬람교도가 아니었다고 한 말이 화가 되었다. 학생들 중 11명이 그를 당국에 신고했다. 파키스탄에서 불경죄에 걸리는 사람들은 대개 기독교인들이다. 2000년 파이살라바드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오거스틴 아시크 '킹리' 마시가 그랬다. 기독교인이었던 마시는 연인과 혼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슬람교도였고 믿을 수 없게도 파키스탄(그리스 이슬람교) 법은 이슬람 여성이 비이슬람 남성과 혼인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슬람교로 개종하고자 했고, 결국 개종 동기가 의심스럽다면서 기소된 것이다. 내가 읽은 기사로 볼 때 그 자체가 사형을 받을 만한 죄였는지, 아니면 그가 예언자의 도덕에 관해 어떤 말을 한 것이 빌미가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어느 쪽이든 편협한 종교로부터 자유로운 법을 지닌 나라에서는 그것이 사형 선고를 받을 만한 죄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2006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압둘 라만이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가 누구를 죽였거나 누구를 다치게 했거나 무언가를 훔쳤거나 무언가를 훼손했던가? 아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자신의 마음을 바꾼 것뿐이다. 내면적으로, 사적으로 마음을 바꾸었을 뿐이다. (...omitted...) 라만은 결국 처형을 피했지만, 그것은 그가 정신이상이 있다고 변명하고 국제 사회의 강력한 압박이 가해진 결과였다. 현재 그는 이슬람교도의 의무를 수행하고자 열심인 광신도들에게 살해당할 위험을 피해 이탈리아의 수용소에 들어가 있다. (...omitted...) 1992년 9월 3일 실제로 사형이 집행된 사례가 있다. 사디크 압둘 카림 말라라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배교죄와 불경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뒤 공개 참수형에 처해졌다.

--p434~436

이번에는 기독교 국가:
하지만 기독교 국가라고 나을 것은 없다. 비교적 최근인 1922년 영국에서 존 윌리엄 고트가 불경죄로 9개월의 중노동을 선고받았다. 예수를 어릿광대에 비교했다는 것이다.

(...omitted...)

미국 텔레반이라는 웹페이지에는 앤 콜터라는 사람의 대단한 말을 시작으로 불쾌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닌 인용문들이 많이 등장한다. (...omitted...) 그 사이트에는 "우리는 그들의 국가를 침략하여 지도자들을 죽이고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켜야 한다," 하원의원 밥 도넌의 "게이(gay)가 신이 아직 돕느냐(God Aids Yet?)의 약어가 아니라면 쓰지 말라", 윌리엄 보이킨 장군의 "조지 부시는 미국 투표자 중 다수가 선출한 것이 아니라 신이 임명했다", 그리고 예전에 Ronald Reagan 행정부의 내무장관이 환경 정책에 대해 한 "재림이 임박했으므로 우리는 환경을 보호할 필요가 없다" 등 주옥같은 말들이 실려 있다. 아프간 텔레반과 미국 텔레반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경전을 글자 그대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들이다. 그들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제정일치제 사회의 삶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소림끼치는 사례를 제공한다. 킴벌리 블레이커의 "극단론의 기초: 미국에서 기독교도의 권리"는 기독교 텔레반(명칭을 쓰지는 않는다)의 위협을 폭로한다.

--p436~438


신앙과 동성애

세번째 절의 주제는 동성애 입니다. 이 부분도 내용이 좀 길어져서 별도의 글로 옮겼습니다.


신앙과 인간 생명의 존엄성

이 절에서는 인간 배아를 바라보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불합리한 시각을 지적합니다. 일단, 이들은 "배아는 인간 따라서 낙태는 살인"이라는 단순한 시각으로 문제에 접근합니다:
인간 배아는 인간 생명의 한 유형이다. 따라서 절대론적 종교관에 따르면 낙태는 무조건 잘못된 것이다. 전적으로 살인이다. (...omitted...) 실제로 테레사 수녀는 노벨 평화상 수락 연설에서 "평화의 가장 큰 파괴자는 낙태다"라고 말했다. 뭐라고? 그렇게 비뚤어진판단을 내리는 여성이 한 말을 어떻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진정으로 노벨상을 받을 만한지는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독실한 척 하는 위선적인 테레사 수녀에게 속아 넘어갈 것 같은 사람은 Christopher Hitchens의 "선교사의 위치: 이론과 현실의 마더 테레사"를 읽어봐야 한다.

(...omitted...)

그 들이 볼 때 문제는 훨씬 단순하다. 배아는 '아기'이고, 그것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다. 그것이 다이다. 논쟁 끝. 이 절대론적 태도로부터 많은 것이 파생된다. 우선 배아 줄기 세포 연구는 중단되어야 한다. 그것이 의학적으로 엄청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 연구가 배아 세포의 죽음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 논리의 모순은 사회가 이미 체외 수정 시술을 받아들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명백히 드러난다. 체외 수정 시술 때 의사들은 난자가 더 많이 나오도록 여성을 자극한 후 배출된 난자들을 몸 바깥에서 수정시킨다. 생존 가능한 접합자가 십여 개 생성되면, 그중 두세 개를 자궁에 이식한다. 그중에서 겨우 하나나 두 개가 살아남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렇게 체외 수정 과정에서 배아가 죽지만, 사회는 거기에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p444~p448

(참고로 히친스의 테레사 비판서는 "자비를 팔다"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되었습니다.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강추예요.)

다음으로는 낙태 시술을 하는 병원을 불 지르고 다니는 불법 단체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정말 세상엔 별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특정한 부류의 종교인은 미세한 세포 덩어리를 죽이는 것과 다 성장한 의사를 죽이는 것의 도덕적 차이를 분간하지 못한다. (...omitted...) 마크 위젠스메이어의 "신의 마음 속 테라"라는 오싹한 저서에는 마이클 브레이 목사와 그의 친구 폴 힐 목사가 "천진난만한 아기의 살해를 중단시키는 것이 잘못된 일인가?"라는 현수막을 펼쳐 들고 있는 사진이 나온다. 둘 다 눈을 부릅뜨고 있는 얼간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잘 차려입고 매력적인 웃음을 띠고 있는 다소 미숙해 보이는 멋진 젊은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과 신의 군대에 속한 그들의 동료들은 임신 중절을 시술하는 병원들에 불을 지르는 일을 본업으로 삼았고, 의사들을 죽이겠다고 노골적으로 말하고 다녔다. 1994년 7월 29일 힐은 의사인 존 브리턴과 그의 경호원 제임스 바릿을 플로리다 주 펜서콜라에 있는 브리턴의 병원 앞에서 총으로 사살했다. 그런 다음 그는 제발로 경찰서를 찾아가서 미래의 '천진난만한 아기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그 의사를 죽였다고 말했다.

결과론 혹은 공리주의적으로 바라본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죠:
얼마만큼 자랐든 인간의 배아가 같은 발달 단계에 있는 소나 양의 배아보다 더 고통을 겪는다고 가정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리고 인간이든 아니든, 모든 배아가 도살장에 있는 소나 양보다 고통을 훨씬 덜 느낀다고 가정하는 것이 어느 모로 보나 합리적이다. 특히 종교의식에 쓰이기 위해 목이 잘릴 때까지 온전히 의식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는 동물들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

위대한 베토밴의 오류

"위대한 베토밴의 오류"는 낙태 반대론자들이 자주 쓰는 수법 중 하나입니다. 저도 들어본 적이 있고요. 하지만 베토밴 가족 이야기는 적절치도 않을 뿐더러 완전히 날조된 것이라고 합니다:
Peter Medawar와 진 메더워는 "생명과학"에서 영국의 하원의원이자 저명한 로마가톨릭 평신도인 노먼 세인트 존 스테바스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고 말한다. (...omitted...)

"임신 중절에 관해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매독 환자이고 어머니는 결핵에 걸렸습니다. 이미 자식을 넷이나 낳았는데, 첫째는 맹인이었고, 둘째는 사산했고, 셋째는 농아였고, 넷째는 결핵에 걸렸지요. 당신이라면 어찌했겠습니까?"

"임신 중절을 시켰겠지요."

"그러면 당신은 베토벤을 살해한 겁니다."

인터넷에는 이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전하는, 이른바 임신 중절 합법화 반대 사이트가 여럿 있으며, 이야기마다 사실을 가리키는 전제들이 제멋대로 변형되어 있다. (...omitted...) 개작된 전설은 그 위대한 작곡가를 다섯째가 아니라 아홉째로 밀어내고 귀가 먼 아이의 수를 셋, 눈이 먼 아이의 수를 둘로 늘리고,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가 매독에 걸렸다고 말한다. (...omitted...) 그것은 창작된 것이 분명하며, 전적으로 틀렸다. 사실 베토벤은 아홉째 아이도, 다섯째 아이도 아니었다. 그는 장남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둘째지만, 첫째가 유아 때 죽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다. 그리고 알려진 바에 따르면 죽은 첫째는 눈이 멀거나, 귀가 먹지도 않았고, 정신지체도 없었다. 그의 부모가 매독에 걸렸다는 증거도 전혀 없다. 비록 그의 어머니가 나중에 결핵으로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에는 그런 사례가 많았다.

사실 그것은 완전히 창작된 전설이다. 어쨌거나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은 지금의 논점과 별 관계가 없다. 설명 거짓말이 아니라도 그것에서 이끌어낸 논증은 사실상 아주 나쁜 논증이다. 메더워 부부는 그 논증의 오류를 지적할 때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의 여부를 굳이 따질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이 불쾌하고 사소한 논리의 배후에 있는 추론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결핵에 걸린 어머니와 매독에 걸린 아버지 그리고 음악 천재의 출산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면, 금욕 때문에 베토벤을 잃는 것이 아니듯이 낙태로 베토벤을 잃는 것도 아니다."

(...omitted...)

'인간의 잠재력' 논증의 논리적 결론은 우리가 성교를 할 기회를 놓칠 때마다 한 인간의 영혼에게서 존재라는 선물을 잠정적으로 빼앗는 셈이라는 것이다. 이 어리석은 임신 중절 합법화 반대 논리에 따르면 번식 능력이 있는 개인의 성교 요구를 거절할 때마다 잠재적인 아이를 살해하는 셈이다! 심지어 강간에 저항하는 것도 잠재적인 아기를 살해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말이 난 김에 덧붙이면 임신 중절 합법화 반대 운동가들의 상당수는 야만적으로 강간을 당한 여성들이 임신 중절을 하는 것까지도 반대한다). 명확히 알 수 있겠지만 베토벤 논증은 정말로 아주 나쁜 논리다. 그것의 초현실적인 멍청함은 몬티 파이톤의 영화 "삶의 의미"에서 마이클 팔린이 "모든 정자는 신성하네"라는 장엄한 노래를 수백 명의 아이들과 함께 부르는 장면에 멋지게 요약되어 있다(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보기를).

--p455~460


온건한 신앙이 광신을 부추긴다

도킨스의 주장을 듣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너무 극단적인 사례만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이 절은 그런 의문에 대한 도킨스의 대답입니다:
여기서 내가 초점을 맞추는 부분은 부드럽고 온건한 종교도 극단주의가 자연스럽게 번성할 수 있는 분위기를 제공하는 데 일조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인간 폭탄으로 훈련시키는 만드는 신앙: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이 말은 이슬람교뿐 아니라 기독교에도 적용된다) 진정으로 유해한 것은 신앙 자체가 미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행위다. (...omitted...) 의문을 품지 않는 신앙이 미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 획득하기 어렵지 않은 다른 요소들을 고려할 때 - 을 미래의 성전이나 십자군 전쟁을 위한 치명적인 무기로 자라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순교자의 낙원을 약속받고 두려움이 없어지면, 그 진정한 신앙의 집약체 즉, '인간 폭탄'은 긴 활, 군마, 탱크, 집속 폭탄과 함께 무기의 역사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할 만하다. 아이들에게 의문 없는 신앙이 우월한 가치를 지닌다고 가르치는 대신 자신의 믿음을 통해 질문하고 생각하는 법을 가르친다면, 자살 테러범은 없어질 가능성이 높다. 자살 테러범은 자신이 종교 학교에서 배운 것을 진심으로 믿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한다. 신에 대한 의무가 다른 모든 것들보다 우선하며, 임무 도중에 순교를 하면 천국의 정원에서 보상을 받을 것이러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것들을 극단적인 광신자에게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예의 바르고 점잖은 주류 종교 교사들로부터도 배운다.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똑같은 옷을 입고 줄지어 앉게 한 다음, 멍한 앵무새처럼 경전의 단어 하나하나를 배울 때마다 천진무구한 작은 머리를 리듬감 있게 끄덕이게 한다. 신앙은 아주 위험하며, 그것을 순진한 아이의 취약한 정신에 계획적으로 주입하는 것은 몹시 잘못된 일이다.

아이들에게 신앙을 주입하는 것은 몹시 잘못된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9장의 주제입니다. 도킨스는 9장에서 종교가 "아동 학대"라고 주장합니다.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에서 가장 독창적인 내용이 바로 9장이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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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는 딸기다

저는 동성애자가 아닙니다. 게다가 영화 등에서 동성애를 묘사하는 장면을 접하면 거부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동성애를 반대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딸기를 싫어하는 것은 개인의 취향이지만, 딸기를 반대하는 것은 멍청한 짓입니다. 좋으면 먹고 싫으면 안먹으면 그만이지, 반대 씩이나 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딸기를 먹지 못하게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죠.

물론 딸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딸기를 강제로 먹이려고 하거나, 딸기가 맛있는 이유를 설명하며 귀찮게 하거나, 자꾸 딸기를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 의도적으로 딸기 냄새를 풀풀 풍기거나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지만 단순히 딸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이나, 딸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딸기를 이야기를 하고, 딸기를 나눠먹고 하는 것 등은 도무지 문제될 일이 없는 것이죠.

(저는 원래 딸기를 좋아해요. 싫어하는 과일을 찾으려다가 도저히 못 찾겠어서 그냥 딸기로 했습니다. 아차, 어륀쥐로 할 걸.)


딸기 반대를 실천하는 사람들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주장을 종종 접합니다. 오만가지 다양한 주장들이 있지만 그 중 특히 해로운 버전을 꼽자면 종교적 믿음을 근거로 한 주장입니다.

다음은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에서 인용한 구절입니다: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에서 동성애에 대한 공식적인 처벌은 사형이었다. 산 채로 묻은 뒤 그 위에 벽을 쌓는 고상한 방법을 써서 말이다. 그 '죄' 자체는 다른 누구에게도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성인들 사이의 동의에 따라 이루어지는 사적인 행위이며, 여기서 다시 우리는 종교적 절대론의 고전적인 증표를 본다. 내 조국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영국에서도 동성애는 1967년까지 범법 행위로 취급되었다. 1954년 Von Neumann과 더불어 컴퓨터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한 영국의 수학자 Alan Turing이 동성애자라는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은 뒤 자살했다. 튜링이 벽 아래 산 채로 묻힌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는 2년 동안 감옥에 들어가든지(다른 죄수들이 그를 어떻게 대할지 상상이 갈 것이다) 가슴을 튀어나오게 하는 호르몬 주사를 맞고 화학적 거세를 당할지, 선택을 하라는 제의를 받았다. 결국 그는 청산가리가 든 사과를 먹는 것으로 개인적인 선택을 했다.

(...omitted...)

미국 탈레반이 동성애를 대하는 태도는 그들의 종교적 절대론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리버티 대학교의 설립자인 Jerry Falwell 목사의 말을 들어보자. "AIDS는 그저 신이 동성애에 내린 처벌이 아니다. 그것은 동성애자들을 묵인한 사회에 대한 처벌이다." (...omitted...) 웨스트버로 침례교의 프레드 펠프스 목사도 동성애자들을 강박적일 정도로 싫어하는 막강한 설교자다. (...omitted...) 그에게는 많은 후원자들과 후원금이 몰린다. 그의 웹사이트에는 그가 1991년 이후로 미국, 캐나다, 요르단, 이라크에서 "신이여, 에이즈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 표어를 들고 2만 2000번(평균 나흘에 한 번꼴)의 동성애 반대 시위를 벌였다고 나온다. 그의 웹사이트에서 아주 흥미로운 것은 사망한 한 동성애자의 이름과 함께 그가 지옥에서 며칠째 불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p439~442

이것이 외국의 얘기일 뿐인 것은 아닙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종교인들이 공공연하게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하고 다닙니다. 예를 들어 지난 2003년에 국가인권위원회가 청소년보호법상의 동성애자 차별조항의 삭제를 권고하자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은 이를 반박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일찍이 동성애로 성문화가 타락했던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진노로 유황불 심판으로 망하였다. 또한 성경은 동성애를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레 18:22, 20:13, 롬 1:27). 동성애가 사회적 지탄 대상이 된 것도 에이즈가 동성애자들에 의해서 많이 전염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대착오적인 성명서가 발표되고 나서 "육우당"이라는 가명을 쓰는 한 동성애자가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습니다:
몰지각한 편견으로 이 사회는 수 많은 성적 소수자를 낭떠러지로 내몰고 있다. 내 한 목숨 죽어서 동성애 사이트가 유해매체에서 삭제되고 소돔과 고모라 운운하는 가식적인 기독교인들에게 무언가 깨달음을 준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이 사건에 대한 한기총의 당시 반응은 이랬습니다:
한기총 김청 홍보국장은 육우당 씨의 죽음이 한기총의 책임이라고 볼 수 없기에 공식적인 사과성명을 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omitted...) 김청 홍보국장은 "그 사람이 죽음을 선택한 것이기에 그 사람 개인의 책임이지 한기총의 책임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 동성애자를 대하는 태도는 둘 중 하나입니다. 위 한기총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상종 못할 죄인들"이라고 보는 입장과, "비정상적인 성적 지향을 가진 환자들"
이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치료가 필요한 환자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접근하죠:
‘동성애의 모든 것’ 강의 마련된다:

강의 내용은 관계 중독에서 치유를 경험한 앨리 선교사의 간증(60분)을 통해:
  • 한 세대의 상처가 다음 세대의 상처에 끼치는 영향
  •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우리의 합법적 필요,
  • 그리고 합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그 필요를 채우려는 우리
  •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의 필요성과 그로 인한 회복
등을 먼저 알린다. 이어 한 평범한 소년·소녀가 동성애자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살펴보는 동성애의 주요 원인에 대한 강의(60분)와 동성애의 예방과 치유, 그리고 교회의 책임에 대한 설명(60분)이 계속된다.

조금 완곡해 보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현대의 건전한 상식에 비추어 보면 턱없이 시대착오적이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동성애는 질병이 아니라 유전적/생물학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는 성적 취향일 뿐입니다.


성경이 정말 동성애를 금하였는가?

교파에 따라 입장이 다릅니다. 한국의 개신교는 매우 보수적인 근본주의 기독교(Christian Fundamentalism)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근본주의 교파에서는 대체로 성경이 "동성애를 금지하였다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위키피디아의 "교파에 따른 동성애에 대한 입장" 페이지를 보면
  • 동성애자가 신자가 되는 것을 허용하는지
  • 동성애자의 안수를 허용하는지
  • 동성결연을 허용하는지
  • 동성결혼을 허용하는지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하여 교파간 입장 차이가 존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미국의 오바마 상원위원(민주당 대선 주자)이 산상수훈을 인용하며 동성애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여 이슈가 되기도 했고요.


맺음말

동성애는 선호의 문제이지, 찬반의 문제가 아닙니다. 편협한 종교적 믿음을 근거로 동성애를 죄악 혹은 (정신적) 질병으로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아무리 잘못된 주장이라도 일단 종교적 믿음으로 포장되고 나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게 마련입니다. 특히 동성애와 같은 개인 취향의 문제와 연관되면 바로 심각한 인권 침해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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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선한' 책과 변화하는 시대 정신 (The 'Good' Book and the Changing Moral Zeitgeist)

시대의 흐름에 따라 도덕적 시대 정신(moral zeitgeist)은 변하고 있는데,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혹은 매우 더디게 수용하는) 종교적 교리와 경전은 이 시대의 도덕관념으로 보았을 때 더이상 선한 책이 아니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비도덕적인 구절들을 잔뜩 인용하고 있는데 대충 흥미로운 구절들을 한줄씩 요약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 노아의 방주 - 자신의 모든 피조물을 (아이들까지 포함하여) 모조리 익사시키고, (아마도 죄가 없었을) 짐승들까지도 죽여버린 야훼의 비도덕성.
  • 소돔과 고모라 - 성난 마을 사람들에게 "두 딸을 내어준" 롯의 비도덕성. 롯은 그 후 (취하긴 했으나 임신을 시키지 못할만큼 취하지는 않은 상태로) 자신의 두 딸과 동침을 합니다.
  • 아브라함과 이삭 -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희생시킬뻔한 아브라함 이야기. 극적인 순간에 천사가 와서 "계획이 취소되었음"을 알려주긴 하지만,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커다란 문제가 남습니다: "현대의 도덕주의자는 그런 심리적 외상을 아이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의 도덕 기준들로 보면, 이 수치스러운 이야기는 아동 학대이자,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에서 발생하는 핍박이자,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때 나오는 것 같은 변명이 처음으로 기록된 사례다"라고 하는군요.
  • 딸을 제물로 올린 입다 - 암몬군을 이기도록 해주면 "제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 누가 맨 처음 문을 열고 마중을 나오든" 그를 번제물로 삼겠다고 약속한 입다. 이번에는 신이 "계획을 취소하지 않아서" 실제로 딸은 죽게 됩니다.
  • 야훼의 질투 - 모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사람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야훼의 대리인인) 모세는 레위인들을 시켜 그 자리에서 3,000명을 죽이고, 남은 사람들에게는 전염병을 퍼트립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두 딸을 내어주어" 집단 강간을 당하도록 만든 롯의 행동은 죄가 아니지만, 다른 신을 섬기는 행위는 커다란 죄가 됩니다. 현대적 기준으로 보았을 때에는 상당히 납득하기 힘들죠.
  • 안식일을 어긴 벌 - 안식일에 한 남자가 장작을 모으다가 걸렸을 때 야훼는 모세에게 "그를 돌로 쳐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이 밖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여기저기에서 많이 접할 수 있는 얘기들입니다. 도킨스가 이런 뻔한(충격적이긴 하지만, 널리 알려졌다는 점에서 뻔한) 이야기를 또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기 위해서 입니다:
물론 신학자들은 우리가 더 이상 창세기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화를 내며 항변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다! 우리는 성서에서 어느 부분은 골라서 믿고, 어느 부분은 상징이나 우화로 간주한다. 그렇게 취사선택하는 행위는 무신론자가 절대적인 근거 없이 이 도덕 규정이나 저 도덕 규정을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적 판단의 문제다. 어느 한쪽이 '직감에 좌우되는 도덕'이라면 다른 한쪽도 그렇다. --p358~359

즉, 6장과 연결되는 주장입니다. 인간의 도덕 관념이 경전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경전을 읽으면서 이미 가지고 있는 도덕 관념에 기반하여 취사선택하고 해석한다는 것이죠.

한편, "신학자들은 우리가 더 이상 창세기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항변할 것이라고 하였지만, 한국과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은 축자영감설, 성경무오설 따위를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아마 다른 방식으로 항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사람들은 성경의 모든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 하거든요.

7장의 뒷부분에는 종교가 집단간 갈등과 증오를 부추긴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실험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대로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텅(진화인류학자 존 하텅)은 이스라엘의 심리학자 George Tamarin의 섬뜩한 연구를 설명한다. 타마린은 8~14세의 이스라엘 아이 1000여 명에게 여호수아서에 나온 예리코 전투 장면을 읽어주었다.

여호수아가 사람들에게 외쳤다. "고함을 쳐라. 주께서 저 도시를 너희에게 주셨다. 저 도시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여 주께 바쳐라...... 하지만 은이나 금, 동이나 철로 만든 집기들은 모두 주께 바칠 것이다. 그것들은 주의 금고에 넣을 것이다." ......그들은 남녀노소, 소, 양, 나귀 등 도시의 모든 것을 칼로 모조리 없앴다...... 그리고 도시와 그 안의 모든 것들을 불태웠다. 오직 은과 금, 동이나 철로 된 집기들만 모아 주의 집에 있는 금고에 넣었다.

타마린은 아이들에게 간단한 도덕 문제를 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올바른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니?" 아이들은 A(전적으로 찬성), B(일부 찬성), C(전적으로 반대) 중에서 답을 선택했다. 결과는 양쪽으로 갈렸다. 66퍼센트는 전적으로 찬성했고, 26퍼센트는 전적으로 반대했으며, 일부 찬성이라는 중간 입장을 택한 아이는 적었다(8퍼센트). 여기 전저긍로 찬성한 집단(A)의 전형적인 대답 중 세 가지를 소개한다.
  • 나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올바른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며 이유는 이렇다. 신은 그들에게 이 땅을 약속했고 정복하라고 허가했다. 그들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거나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교도들에게 동화될 위험에 처했을 것이다.
  • 내 생각에 여호수아가 그렇게 한 것은 옳았다. 한 가지 이유는 신이 이스라엘 부족들이 그들에게 동화되어 나쁜 행동을 배우지 않도록 그들을 전멸시키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다른 종교를 갖고 있었고, 여호수아가 그들을 죽여 그들의 종교를 세상에서 없애버렸기 때문에 그는 옳았다.

여호수아의 대량 학살을 정당화하는 근거는 어느 모로 보나 종교적이다. 전적으로 반대한 C 집단에 속한 아이들 중에도 일부는 모호한 종교적 이유로 그 쪽을 택했다. 한 소녀는 여호수아가 예리코를 정복하려면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반대라고 대답했다.
  • 아랍인들은 불결한데, 불결한 땅에 들어가면 그도 불결해지고 그들의 저주를 함께 떠안게 되므로 나쁘다고 생각한다

전적으로 반대한 다른 두 명은 여호수아가 전리품으로 좀 남겨놓지 않고 모든 동물과 재산을 파괴했기 때문에 그렇게 답했다.
  • 여호수아가 자신들을 위해 동물을 살려둘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잘했다고 보지 않는다.
  • 여호수아가 예리코의 재산을 남겨놓을 수도 있었기에 잘했다고 보지 않는다. 재산을 없애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것이 되었을테니까.
(...omitted...)

타마린 실험에 참여한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순진했다. 아마 그들의 비정한 견해는 그들이 자란 문화 집단이나 부모의 견해였을 것이다. (...omitted...) 타마린은 실험을 할 때 흥미로운 대조 집단을 설정했다. 168명의 이스라엘 아이들로 된 별도의 집단에 여호수아서의 같은 대목을 읽어주면서 여호수아라는 이름 대신에 '린 장군', 이스라엘 대신에 '3000년 전의 중국 왕조'를 넣었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린 장군의 행동에 찬성한 사람은 7퍼센트에 불과했고, 75퍼센트는 반대했다. 다시 말해 유대교라는 요소를 고려 사항에서 제외시키자, 대다수 아이들은 현대인의 다수가 지닌 도덕적 판단과 일치하는 의견을 냈다. 여호수아의 행동은 야만적인 집단 학살 행위였다. 그러나 종교적 관점을 취하면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 그리고 그 차이는 삶의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아이들에게 대량 학살을 비난하거나 용납하게 하는 등 견해 차이를 빚어내는 것이 바로 종교였다.

(...omitted...)

하텅의 재미있는 논문에는 흥미진진한 내용이 더 많이 실려 있으며, 한 번 더 그것을 추천하면서 그 인용문을 소개한다.

성경은 대량 학살, 외집단의 노예화, 세계 지배에 대한 명령들을 구비한 내집단 도덕의 청사진이다. 그러나 성경이 악한 목적을 지닌 것도, 살인이나 잔혹 행위나 강간을 찬미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고대의 많은 작품들이 내집단 도덕을 담고 있다. 일리아드, 아이슬란드 전설, 시리아의 옛 이야기, 고대 마야인의 암각화 등이 그렇다. 하지만 일리아드를 도덕의 토대로 판매하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성경은 사람들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안내서로 판매되고 구매된다. 그리고 그것은 전대미문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어 있다.

(...omitted...)

나는 인간이 종교가 없다고 할지라도 내집단에 충성하고 외집단을 적대하는 강한 성향을 보이리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omitted...) 하지만 종교는 적어도 세 가지 방식으로 그 피해를 증폭시키고 악화시킨다:
  • 아이들에게 꼬리표 붙이기. 아이들은 아주 일찍부터 '구교 아이들'이나 '신교 아이들' 하는 식으로 묘사되며, 이는 그들이 종교에 관한 생각을 정립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렇다(이 아동학대 문제는 9장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 분리된 학교. 아이들은 아주 이른 나이부터 종교적 내집단의 또래들과 함께 그리고 다른 종교 집안의 아이들과는 격리되어 교육을 받는다. 만일 분리 교육이 폐지된다면 북아일랜드 분쟁이 한 세대만에 사라질 것이라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 이교도와의 혼인을 금기시함. 이것은 반목하는 집단들의 혼합을 막음으로써 다툼과 복수가 대물림되도록 한다. 집단들의 혼인을 허용한다면 적대감은 자연히 누그러지는 경향을 보일 것이다.

--p383~394

나라별로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부여된 연대

도킨스는 각 나라별로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부여된 연대"를 나열하며, 이것이 도덕적 시대정신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변화하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종교인이든 아니든,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관한 우리의 태도는 크게 변해왔다. (...omitted...) 어느 사회든 다소 수수께끼 같은 합의가 존재하며, 그것은 수십 년에 걸쳐 바뀐다. 독일어에서 유래된 시대정신(Zeitgeist)이라는 말을 써도 결코 잘난 척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여성의 참정권이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말했지만, 이런 개혁은 사실 놀라울 정도로 최근에 이루어진 것이다. 다음은 나라별로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부여된 연대다.
  • 뉴질랜드 1893년
  • 오스트레일리아 1902년
  • 핀란드 1906년
  • 노르웨이 1913년
  • 미국 1920년
  • 영국 1928년
  • 프랑스 1945년
  • 벨기에 1946년
  • 스위스 1971년
  • 쿠웨이트 2006년

20세기 전체에 걸쳐 있는 이 연대들은 변화하는 시대정신의 척도가 된다. 이와 함께 시대정신의 또 다른 척도는 인종을 보는 우리의 태도다. 20세기 초에 영국(그리고 다른 많은 국가들)에 살았던 사람들은 거의 다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인종차별주의자로 판단될 것이다.

--p400~410

도덕적 시대정신은 변하고 있으며, 이를 이끄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는 것, 따라서 종교가 "선"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이 장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성경의 온갖 비상식적이고 잔인하고 비도덕적이고 비과학적인 주장들을 현대의 시대정신에 맞추기 위해 신학자들은 온갖 기상천외한 설명들을 갖다 붙입니다. 하지만 신학자가 아닌 사람들은 신학자들보다 훨씬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되는거죠:

"성경은 전지전능한 신의 계시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이 당시의 상식을 기준으로 쓴 것이기 때문에, 현대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엉성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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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도덕의 뿌리: 우리는 왜 선한가? (The Roots of Morality: Why Are We Good?)

6장과 7장은 도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6장에서는 우리가 선하게 살기 위해서는 "종교" 혹은 "신"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반박하고, 우리는 신이나 종교 없이도 선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6장에서 우리가 신이나 종교 없이도 선하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면, 7장에서는 오히려 신이나 종교가 없어야 우리가 더 선하게 살 수 있다는 주장을 합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도덕적 시대적신은 변하고 있는데,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혹은 매우 더디게 수용하는) 종교적 교리와 경전은 이 시대의 도덕관념으로 보았을 때 더이상 선한 책이 아니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6,7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신이 없어도 착하게 살 수 있을 뿐 아니라(6장), 오히려 신이 없는 것이 더 좋다(7장)"

이하는 6장에서 재미있었던 부분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다윈주의와 도덕의 기원 (Does Our Moral Sense have a Darwinian Origin?)

우리가 왜 어떠한 것을 "도덕적"이라고 생각하고 또 어떠한 것은 "부도덕"이라고 말하는지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도킨스는 도덕의 기원에 대한 두 가지 수준에서의 설명을 제시하고 있는데 첫번째는 조금 더 생물학적인 수준에서 "이기적 유전자들의 상호작용이 어떻게 이타주의를 이루어낼 수 있는가?"에 대한 부분이고, 두번째는 조금 더 높은 수준에서 인간의 도덕 감정이라는 것에 대한 부분입니다.

첫번째 수준의 논의는 보통 생물학적 이타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6장 도입부에서 도킨스가 간단히 언급하고 있는 메커니즘들은 다음 네 가지입니다:
  • 혈연적 이타주의
  • 호혜성 이타주의
  • 평판
  • 과시

혈연적 이타주의는 이기적 유전자 이론(혹은 포괄적응도 이론)에 의해 개체 간 유전적 근친도에 따라 이타적 행위가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호혜성 이타주의는 유전적 근친도가 아니라 게임 이론(Game Theory)에 기반하여 이기적 개체들 자신의 이득을 최대화 하기 위해 협력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음을 설명합니다. 도킨스는 "The Origins of Virtue"라는 책을 추천하고 있는데, 이 책은 "이타적 유전자"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재미있어요)

네번째 메커니즘인 "과시"를 도킨스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사실 아주 재미있는 일입니다. 과시 이론(핸디캡 원리)는 이스라엘의 과학자인 아모츠 자하비의 이론인데, 초기에 도킨스는 이 이론을 "조롱"했었습니다(이기적 유전자 등에서). 그런데 이후에 입장이 바뀐 것이죠. 최근 저서 중 하나인 악마의 사도(A Devils Chaplain)에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별 인기를 끌지 못했고 심할 때는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던 Amotz Zahabi의 이론은 최근에 앨런 그래펀의 힘을 빌려 완벽하게 소생했고, 지금은 진화생물학자들이 진지하게 고찰하는 이론이 되어 있다. --p262

신진 진화심리학자 중 한명인 제프리 밀러는 메이팅 마인드(The Mating Mind)에서 자하비의 초기 이론이 인정받지 못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처음에 반발을 산 것은 생물학자들이 신호 비용에 대한 경제학계의 연구를 잘 몰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1960년대 경제학계의 게임이론가들은 거짓말을 할 동기가 충분한 상황에서 신호에 신뢰성을 부여해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많은 연구를 했다. 그들은 신호전달이론을 개발했다. 이것은 두 종류의 신호를 구별하는 방법에 대한 이론이다. 한 종류의 신호는 많은 비용과 노력을 요하기 때문에 신호를 만든 자의 진심을 나타내는 믿을 수 있는 지표다. 다른 하나는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 신호로서, 경제학자들은 빈말이라고 부른다. 경제학자들은 이런 빈말은 믿을 게 못된다고 말한다. 빈말은 실천이 따르지 않으며, 진정한 능력을 보여주지 않는다. 비용이 수반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p194~195

두번째 수준 - 인간의 도덕 판단 - 의 논의는 다음 절에서 별도로 다루고 있습니다.

사례 연구로 살펴본 도덕의 뿌리 (A Case Study in the Roots of Morality)

이 부분은 마크 하우저의 "도덕적 마음"을 요약한 내용인데, 다양한 상황에서 인간이 어떠한 행위를 더 도덕적이라고 느끼는지에 대한 실험을 통해 인간의 도덕 판단의 기저에 "보편 도덕 문법" 같은 것이 있다는 주장을 합니다. 참고로, 여기에서 말하는 보편 도덕 문법이란 촘스키의 "(언어학적) 보편 문법"에서 따온 개념입니다. 사실 "문법"이라는 표현에 오해의 소지가 많은데, 문법 보다는 규칙이라고 하면 조금 더 나을 것 같아요. (여전히 오해의 소지는 있습니다만)

신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선하려 애쓰겠는가? (If There is no God, Why be Good?)

이 절의 제목에 대해서는 다음 인용구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에게 잘 보이려고 선하게 사는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생각이라는 주장입니다:
질문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니 아주 야비해 보인다. 종교인이 내게 그런 식으로 물을 때(그들 중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한다) 나는 다음과 같이 반문하고 싶은 유혹을 순간적으로 느끼곤 한다. "당신이 선하고자 애쓰는 이유가 오로지 신의 인정과 보답을 얻거나 신의 불만과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말인가요? 그것은 하늘에 있는 거대한 감시 카메라를 돌아보면서 혹은 당신의 머리에 든 아주 작은 도청 장치에 대고 아첨하고 비위를 맞추는 것이지 도덕이 아닙니다."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오로지 처벌이 겁나서 그리고 보상을 바라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한 것이라면 우리는 정말로 딱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마이클 셔머는 "선과 악의 과학"에서 그것을 "논쟁 중단 장치"라고 불렀다. 신이 없을 때 자신이 '강도, 강간,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는 말에 동의한다면, 당신은 부도덕한 사람임을 자인하는 것이며, "우리는 당신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라는 충고를 받을 것이다". 반면에 신의 감시를 받지 않을 때에도 자신이 선한 사람으로 남아 있을 것임을 인정한다면, 당신은 우리가 선하려면 신이 필요하다는 자신의 주장을 치명적으로 훼손하게 된다.

--p344~345

이 절에서 두번째로 흥미로웠던 부분은 핑커가 "빈 서판"에 썼던 몬트리올 파업 사태를 인용하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경찰이 파업하자 지옥이 되어버린 도시"를 읽어주세요.

마지막으로, 가치 판단의 문제와 사실의 문제를 구분해야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실과 가치를 혼동하는 문제는 신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다양한 경우에 매우 흔하게 범하는 오류 중 하나입니다:
설령 우리가 도덕적이 되기 위해 신이 필요하다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은 신의 존재 가능성을 더 높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의 존재를 더 바람직하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많은 사람들은 그 차이를 알지 못한다)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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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종교의 뿌리(The Roots of Religions)

5장에서는 종교가 세상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진화론적 가설들을 제시하고, 최근에 새로운 종교가 생겨난 사례(화물 숭배)를 살펴봅니다.

종교라고 하는 인류학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현상을 왜 진화론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신다면 다음 책들 중 한 권을 읽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 진화심리학(The Evolutionary Psychology) by David Buss
  •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 by Richard Dawkins
  • 이타적 유전자(The Origins of Virtue) by Matt Ridley
  • 통섭(Consilience) by Edward Wilson

참고로, 5장의 목적은 "종교의 뿌리를 완벽하게 설명하는 이론"을 정립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봐라, 종교는 세상 어디에나 있잖아. 신이 있다는 증거야"라는 식의 주장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도킨스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신이 그랬어"라는 것이 유일한 설명이 아니며, 그것보다 개연성이 높은 다른 대안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점입니다.

이번에는 서론이 길었군요. 본론으로 들어가서, 5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가설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집단 선택(Group Selection) 가설. 엄밀히는 집단 선택이 아니라 생태적 대체(ecological replacement).
  • 진화적 적응의 부산물(Evolutionary Byproducts) 가설
  • 밈 가설(Meme)

1. 집단 선택 가설

기독교가 일종의 집단 선택을 통해 살아남았다는 주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고고학자인 Colin Renfrew는 기독교가 일종의 집단 선택을 통해 살아남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내 집단에 대한 충성심과 형제애를 고취시키고, 덜 종교적인 집단들의 희생하에 종교적인 집단들이 살아남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집단 선택론 옹호자인 D.S.윌슨은 "다윈의 대성당"에서 독자적으로 비슷한 주장을 전개했다. --p259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도킨스는 집단 선택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도킨스의 가장 대표적인 저서인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의 전체 스토리는 집단 선택론을 비판하고 유전자 선택론(Gene Selection)을 제안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죠:
집단 선택을 경시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집단 선택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문제는 그것이 진화에 의미 있는 힘을 발휘하는가의 여부다. 그것이 더 낮은 수준에서 일어나는 선택과 맞붙었을 때, 낮은 수준에서의 선택이 더 강한 힘을 발휘할 가능성이 높다. 앞서 언급한 가상의 부족을 예를 들어, 부족을 위해 죽고 거룩한 보상을 받고자 하는 순교자들이 주류인 군대에 이기적인 전사가 한 명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전투에서 몸을 사렸기에 승자가 될 가능성은 약간 줄어들 것이다. 반면에 순교한 동료들보다는 평균적으로 더 큰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순교자들은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동료들보다 번식할 가능성이 더 높고, 순교를 거부한 그의 유전자는 다음 세대로 전달될 가능성이 더 높다. 따라서 순교하는 경향은 세대가 지날수록 약해질 것이다(즉, 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인류 부족 간 경쟁의 경우 집단 선택과 유사한(엄밀히 말하면 "생태적 대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델이 효과적인 경우도 있다고 말하고 있군요:
집단 선택이 진화적으로 강력한 역할을 담당하는, 특수한 상황을 기반으로 한 수학 모형을 구축할 수 있다. 그 특수한 조건들은 대개 자연 상태에서는 비현실적이지만, 인간의 집단들 사이에서는 종교가 바로 그런 비현실적인 특수한 상황을 조성할 수 있다. (...omitted...) 다윈이 개체 수준의 선택(Individual Selection)을 옹호하면서도 인류 부족을 논의할 때는 집단 선택론에 가까이 다가가곤 했다는 점만 언급하기로 하자:

두 원시 부족이 같은 고장에 살면서 경쟁을 한다고 하자. (다른 조건들은 동등할 때) 한 부족이, 서로 돕고 지켜주는 용감하고 협력적이고 신실한 구성원들의 수가 더 많다면 그 부족이 번성하여 다른 부족을 정복하게 되리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서로 견해가 다른 사람들은 뭉치지 않을 것이고, 뭉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위의 자질들을 갖춘 부족은 널리 퍼져나가 다른 부족들을 정복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 전체를 보건대 시간이 흐르면서 그 부족도 다른 우수한 자질을 지닌 부족에게 정복당할 것이다.

--p261~262

2. 진화적 적응의 부산물 가설

종교 자체가 어떠한 적응 문제(Adaptive Problem)를 해소하기 위해 진화한 것이 아닌 다른 진화적 적응의 부산물이라는 가설입니다. 이 가설은 "무엇에 대한 부산물인가?"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뉘는데 내용이 좀 길어서 따로 정리했습니다. "종교는 진화적 부산물인가"라는 글을 참고해주세요.

3. 밈 가설

밈이란 리처드 도킨스가 고안한 말로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의 뒷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필자는 새로운 종류의 복제자가 최근에 바로 이 지구 위에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omitted...) 그것은 여전히 어린 상태로 있어서 진화의 토대가 될 원시 수프(primeval soup)를 찾아 허둥지둥 떠돌아다니지만, 헐떡이며 따라오는 구시대의 유전자를 저 뒤에 남겨 놓을 만큼의 진화의 속도를 벌써 획득하고 있다. (...omitted...) 그 새로운 수프는 문화의 수프이다. 그 새로운 복제자에 대한 어떤 이름이 필요한데, 문화의 전달 단위나 모방 단위라는 개념을 함축하고 있는 명사이어야 할 것이다.

모 방에 알맞은 그리스어의 어근은 'mimeme'라는 것인데 내가 바라는 것은 'gene'이라는 단어와 발음이 유사한 단음절의 단어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에서 이야기한 그리스어의 어근을 'Meme'으로 줄여야 하는데 이에 대해 고전학자들의 관용을 바라는 바이다. 만약 이것이 허락된다면 Meme이라는 단어는 기억(memory) 또는 이것에 상당하는 프랑스어(meme) 단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Meme 의 예에는 곡조나 사상, 표어, 의복의 양식, 단지 만드는 법, 또는 아치 건조법 등이 있다. 유전자가 유전자 풀 내에서 번식하는 데 정자나 난자를 우난체로 하여 몸에서 몸으로 뛰어넘는 것과 같이 Meme이 Meme 풀 내에서 번식할 때에는 넓은 의미로 모방이라고 할 수 있는 과정을 매개로 하여 뇌에서 뇌로 건너다니는 것이다. 만약 과학자가 좋은 생각을 듣거나 또는 읽거나 하면 그는 동료나 학생에게 그것을 전할 것이다. 그는 논문이나 강연에서도 그것을 언급할 것이다. 이처럼 그 생각을 잘 이해하면 뇌에서 뇌로 퍼져 자기 복제한다고 말할 수 있다.

--p308~309

종교의 뿌리에 대한 밈 가설이란 유전자 부동(Genetic Drift)와 유사한 방식으로 종교에 대한 밈들이 임의적으로 진화해왔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그가 생각하는 생존가 높은 밈들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절대적인 '정점'을 지니거나 기존 밈복합체와 화합함으로써 밈풀에서 생존가를 지닐 법한 종교적 밈들의 목록을 몇 가지 나열해보자:

  • 당신은 죽어도 살 것이다.
  • 당신이 순교한다면 72명의 처녀와 즐길 수 있는, 천국 중의 천국으로 갈 것이다(그 불운한 처녀들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말라).
  • 이교도, 신성 모독자, 배교자는 죽여야 한다(혹은 가문에서 추방하는 등의 처벌을 가해야 한다).
  • 신을 믿는 것은 가장 큰 미덕이다. 믿음이 흔들린다면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더 노력하고 신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하라.
  • 신앙(증거 없는 믿음)은 미덕이다. 당신의 믿음이 증거와 어긋날수록, 당신은 더 고결해진다. 증거와 이성에 맞서, 진정으로 기이하고, 지지를 못 받고, 지탱될 수도 없는 것을 어떻게든 믿는 믿음의 대가는 특히 커다란 보상을 받는다.
  • 모든 사람들, 종교 신앙을 지니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종교 신앙을 지닌 사람들에게 더 높은 수준의 존경을 자동적으로 표해야 한다.
  •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기이한 것들(삼위일체, 성체화, 성육화 같은 것들)이 있다. 그것들을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말라. 그 시도가 그것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신비라고 부르는 것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라.
  • 아름다운 음악, 미술, 조각은 자기 증식하는 종교 개념의 발현물들이다.

아마 위의 목록 중 일부는 절대적인 생존가를 지니고 있어서 어느 밈복합체에서도 번성할 것이다. 그러나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일부 밈들은 딱 맞는 배경을 이루는 다른 밈들하에서만 생존하면서 개체가능한 밈복합체를 구성한다. 서로 다른 두 종교는 두 개의 대체될 수 있는 밈복합체로 볼 수도 있다. 아마 이슬람교는 육식동물 유전자 복합체에 상응하고, 불교는 초식동물 유전자 복합체에 상응할 듯 하다. 한 종교의 개념들은 그 어떤 절대적인 의미에서도 다른 종교의 개념들보다 '더 낫지' 않다. 육식동물 유전자들이 초식동물 유전자들보다 '더 낫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유형의 종교적 밈들이 반드시 살아남는 절대적인 능력을 지닌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자기 종교의 다른 밈들이 있을 때 번성한다는 의미에서 우수하다. 그러나 다른 종교의 밈들이 있을 때는 그렇지 못하다. 이 모형에 따르면 이를테면 로마 가톨릭과 이슬람교는 반드시 개인들이 설계했다고는 볼 수 없으며, 같은 밈복합체의 다른 구성원들이 있을 때 번성하는 대체 가능한 밈들의 집합으로서 따로 진화한 것들이다.

--p303~307

여기까지가 종교의 뿌리를 설명하는 몇 가지 가설들입니다. 이 중 하나만 옳고 나머지는 틀렸다거나, 이 이외의 가능성은 없다거나, 이 가설들이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거나 하는 얘기는 아니고, 위 가설 중 일부가 종교 현상의 일부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정도로 이해하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5장의 마지막에서는 새로운 종교가 급속도로 만들어진 최근 사례인 "화물 숭배 의식"을 살펴보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화물 숭배 의식"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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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에서는 새로운 종교 의식이 극도로 빠르게 생겨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화물 숭배 의식(Cargo Cult)"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태평양 멜라네시아와 뉴기니의 '화물 숭배 의식'은 가장 유명한 실제 사례다. 이 숭배 의식들 중 몇 가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 역사를 생생하게 담고 있다.

(...omitted...)

섬 주민들은 경이로운 물건들을 쓰는 백인들이 결코 그것을 만들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수리가 필요하면 백인들은 물건을 멀리 보냈고, 배나 나중에는 비행기의 '화물'로 새 물건들이 계속 도착했다. 백인들은 물건을 만들거나 수선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인 적이 없고, 유용성이 있어 보이는 행동도 전혀 하지 않았다(책상 뒤에 앉아서 서류를 만지작 거리는 행위는 일종의 종교 의식처럼 보인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화물은 초자연적인 기원을 지닌 것이 분명했다. 그 점을 확인해주려는 듯, 백인들은 종교 의식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특정한 행동들을 했다:

그들은 높다란 기둥을 세우고 전선을 매달았다. 그들은 불빛을 반짝이며 신기한 잡음과 억눌린 목소리를 흘려보내는 작은 상자들 앞에 앉아서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동네 주민들에게 똑같은 옷을 입고 위 아래로 행진하라고 시켰다. 그보다 더 쓸모없는 짓은 떠올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원주민들은 그 수수께끼의 해답을 우연히 발견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은 백인들이 신에게 화물을 보내달라고 올리는 의식이라는 것을 말이다. 원주민도 화물을 원한다면, 그런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분명했다.

--p308~310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가짜 비행기, 가짜 탑, 가짜 활주로)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종류의 의식이 서로 다른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문화적 교류 없이) 수십차례 발생했다는 것이며, 그 의식들 사이에 상당한 공통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류학자들은 뉴칼레도니아에서 두 번, 솔로몬 제도에서 네 번, 피지에서 네 번, 뉴헤브리디스에서 일곱 번, 뉴기니에서 50번 이상 독자적으로 그런 의식이 출현했으며, 대부분은 아무 연관도 없이 출현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 종교들은 대부분 메시아가 묵시록의 날에 화물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p310

도킨스는 또한 화물 숭배 의식을 조사하기 위해 현지(탄나 섬)를 방문한 아텐버로라는 사람의 기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 재림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입니다:
1950년대에 젊은 아텐버로는 사진사 제프리 멀리건과 함께 존 프럼 숭배 의식을 조사하기 위해 탄나 섬으로 갔다. 그들은 그 종교의 증거들을 많이 찾아냈고, 수소문 끝에 고위 사제인 남바스라는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남바스는 자신의 구세주를 존이라고 친숙하게 불렀고, '라디오'를 통해 정기적으로 그와 대화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존의 것인 라디오)은 허리에 전선을 감은 '노파'인데, 그녀가 무아지경에 빠져서 중얼거리면 자신이 존 프럼의 말을 해석한다는 것이었다. 남바스는 아텐버로가 자신을 만나러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존 프럼이 라디오로 말해주었다는 것이다. 아텐버로는 라디오를 보여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이해할 수 있다). 그는 화제를 바꾸어서 존 프럼을 본 적이 있는지 물었다:

남바스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보았지."

"어떻게 생겼나요?"

남바스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당신처럼 생겼어. 얼굴이 하얗고, 키가 컸지. 그리고 남아메리카에 오래 살았대."

이 세부 묘사는 존 프럼의 키가 작다는 전설과 모순된다. 그것이 바로 전설이 진화하는 방식이다.

사람들은 존 프럼이 돌아오는 날을 2월 15일이라고 믿었지만, 연도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추종자들은 해마다2월 15일에 모여서 그를 맞이하는 종교 의식을 올린다. 아직까지 그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들은 낙심하지 않는다. 아텐버로는 샘이라는 숭배자에게 물었다:

"하지만, 샘. 존이 화물이 올 거라고 말한 지 19년이나 지났잖아요. 그는 약속하고 또 약속했지만 화물은 아직 안 오고 있어요. 19년이면 좀 오래 기다린 거 아닌가요?"

샘은 땅을 향해 있던 시선을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당신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오기를 2000년 동안 기다릴 수 있었다면, 나도 존을 19년 이상 기다릴 수 있지요."

--p311~313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의식의 일환으로 미군을 흉내내고 있는 원주민들)

도킨스가 그의 책에서 화물 숭배를 다루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태평양 남부의 화물 숭배 의식을 너무 많이 다루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것들은 종교가 거의 무에서 출현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흥미롭고 현대적인 모형이다. 특히 그것들은 종교의 기원 전반에 관해 네 가지 교훈을 제시한다.

첫째, 하나의숭배 의식이 놀라운 속도로 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출현 과정이 그 궤적을 감춘다는 것이다. 존 프럼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실존 인물로서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실존 인물이었다면 아주 최근 사람일텐데, 그가 정말로 살아 있었는지 확실하지가 않다.

셋째, 비슷한 숭배 의식들이 다양한 섬에서 독자적으로 출현한다는 점이다. 이 유사성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면 인간의 심리와 그것의 종교 수용성에 관해 무언가 알 수 있을 것이다.

넷째, 화물 숭배 의식은 서로 비슷할 뿐 아니라 더 오래된 종교들과도 비슷하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기독교를 비롯한 고대 종교들은 존 프럼에 대한 숭배처럼 지역 숭배 의식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사실 옥스퍼드 대학교의 유대학 교수인 게자 베르메스 같은 사람들은 예수가 당시 비슷한 전설들이 무성했던 팔레스타인에서 출현한 여러 인물들 중 하나였다고 주장해왔다. 그 숭배 의식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p314~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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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신이 없는 것이 거의 확실한 이유 (Why There Almost Certainly is No God)

4장에서는 3장에서 비판하지 않고 넘어간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 5번 "설계 논증"을 비판하고, 그에 대한 과학적 대안으로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와 "인본 원리"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설계 논증의 한 형태인 "보잉 747 논증"을 변형하여 "궁극적 보잉 747 논증"을 만들어내는데, 이 논증은 "신이 없는 것이 거의 확실한 이유"를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보잉 747과 고물 야적장

이 장은 현대의 가장 대중적인 설계 논증으로, 많은 유신론자들 사이에서 "완벽한고 설득력 있는 논증"으로 비치는 비개연성(improbability) 논증을 소개하면서 시작합니다:
호일(프레드 호일)은 생명이 지구에 출현할 확률이 고물 야적장을 휩쓰는 태풍이 운 좋게 보잉 747을 조립해낼 확률과 별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비유를 복잡한 생명체의 진화를 언급할 때 활용해왔으며, 그런 언급은 꽤 설득력 있게 들린다. ... 아주 간결하게 줄인 이것이 바로 창조론자가 선호하는 논증이다. --p174~175

한편, 지적 설계론(ID - Intelligent Design) 또한 "싸구려 턱시도를 차려입은 창조론"일 뿐이며, 설계 논증의 변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창조론자가 남용하는 비개연성 논증은 늘 똑같은 형식을 취하며, 그것은 창조론자가 정략적으로 지적 설계라는 세련된 옷을 입고 위장을 한다고 해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 --p175

설계론자(혹은 창조론자)들의 비개연성 논증이 공격하는 지점은 크게 네 곳입니다.
  1. 물리법칙들이 조금만 달랐어도 우주에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었을터인데, 어떻게 물리법칙들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게 되었는가?
  2.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가 지금과 조금 달랐거나, 지구의 자전궤도가 조금만 더 타원이었거나, 목성이라는 거대한 중력 방어막이 없었다면 지구에는 생명이 살 수 없었을터인데, 어떻게 지구가 딱 이와 같은 환경을 갖추게 되었을까?
  3. 원시 지구에서 어떻게 생명이 우연히 탄생할 확률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낮다. 어떻게 지구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4. 원시 생명체가 어떻게 지금과 같이 복잡하고 다양한 유기체로 변할 수 있었는가?
설계논증에 의하면 위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모두 "초월적 설계자에 즉, 신에 의해서"가 됩니다. 무신론자인 도킨스는 설계논증을 거부하고 1,2,3번에 대해서는 "인본 원리"로, 4번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본원리

인본원리는 직관적이고 단순합니다. "어떻게 지구는 딱 생명이 살기에 적당한 환경을 이루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입니다. 우주에는 수많은 행성이 있고, 각각 다양한 환경을 이루고 있는데 그중 극히 일부가 생명이 살기에 적당한 환경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 하나에서 살고 있는 생물인 우리 인간이 이와 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주에 대한 질문도 마찬가지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생성해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우주에서 그 문제를 논의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인본 가설은 통계적 성격을 띄는데, 우주라는 시공간은 과학자들의 손을 들어줍니다. 예를 들어 아주 보수적으로 추정을 하더라도 "우주에 있는 쓸 만한 행성의 수는 1000만조 개(p215)"에 이른다고 합니다. 생명의 기원 즉, DNA에 상응하는 무언가가 자발적으로 출현할 확률이 행성 10억 개 중 하나에서나 일어날 수 있을 만큼 희박하다고 가정하더라도 생명이 출현할 행성은 10억 개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책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빅뱅 이후 150억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생명의 자발적 탄생은 필연"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해보게 됩니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

어떻게 해서든 일단 최초의 생명(자기복제가)이 단 한 번 만들어지기만 한다면, 그 이후는 더 이상 확률 계산에 의지하지 않고,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로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각 개체는 자신과 닮은(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은) 자손을 낳고, 각각 조금씩 다른 자손들(변이)이 제한된 자원을 놓고 경쟁하며(경쟁), 주어진 환경에 조금이라도 더 잘 적응하는 자손이 더 높은 확률로 생존 및 번식하게 되며(선택), 이 개체의 자손들은 이 개체와 닮았을 것이므로 더 높은 생존가를 갖고, ... 과 같이 변이와 경쟁 그리고 선택이 반복되면서 점진적으로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높아지게 된다는 것이 다윈 진화론의 골자입니다.

위 방식에 의하면 설계자 없이도 우연적 변이와 자연선택의 반복을 통해 점점 더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높은 생명체가 만들어지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도킨스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라는 개념이 설계 논증의 핵심을 파괴하는 강력한 의식-각성제(Consciousness Raiser)라고 말합니다:
철학자 Daniel Dennett은 진화가 우리가 지닌 가장 오래된 개념 중 하나를 반박한다고 지적했다. "바로 크고 엄청나고 명석한 것이 그보다 못한 것을 만든다는 개념이다. 나는 그것을 적하(trickle-down) 창조론이라고 부른다. 당신은 창이 창 제작자를 만드는 광경을 결코 볼 수 없을 것이다. 편자가 대장장이를 만드는 광경도 결코 볼 수 없을 것이다. 도기가 도기공을 만드는 광경도 결코 못 볼 것이다." Charles Darwin은 지극히 반직관적인 일을 하는 작동 가능한 과정을 발견함으로써 인류 사상에 혁신적인 기여를 했을 뿐 아니라, 의식을 일깨우는 힘도 제공했다.

--p182

환원불가능한 복잡성(Irreducible Complexity)

설계 논증의 단짝 중 하나는 환원불가능한 복잡성(IC - Irreducible Complexity) 개념입니다. IC란:
눈이나 날개 같은 극도로 복잡한 기관은 완벽한 형태가 갖춰지기 전에는 개체에게 아무런 이점도 제공하지 못한다는 특성 상 자연선택에 의한 점진적 진화로는 절대로 설명될 수 없다.

는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즉, 눈은 "보든지 못 보든지 둘 중 하나이며, 날개도 날든지 못 날든지 둘 중 하나라는" 주장입니다. 점진적으로 진화하는 과정에 있는 반쪽짜리 눈 혹은 반쪽짜리 날개는 개체에게 아무런 이득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완전한 눈 혹은 완전한 날개로 진화될 수 없다는 것이죠.

도킨스는 환원불가능한 복잡성 개념이 가지는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비개연성 논증을 전개하고자 하는 창조론자들은 언제나 생물학적 적응이 대박 아니면 깡통의 문제라고 가정한다. '대박 아니면 깡통' 오류는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 수술로 수정체를 제거한 백내장 환자는 안경이 없으면 선명한 상을 볼 수 없지만, 그래도 나무에 부딪히거나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지 않을 만큼은 볼 수 있다. 반쪽짜리 날개가 온전한 날개보다 못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날개가 아예 없는 것보다는 분명히 더 낫다. 반쪽(50퍼센트)짜리 날개는 높은 나무에서 떨어질 때 속도를 늦춤으로써 당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그리고 51퍼센트짜리 날개는 그보다 약간 더 높은 나무에서 떨어질 때 당신의 목숨을 구해줄 것이다.

(...omitted...)

마찬가지로, 50퍼센트짜리 눈이 49퍼센트짜리 눈으로는 구하지 못할 목숨을 구해줄 상황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 편형동물은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인간의 반쪽짜리 눈보다도 못한 눈을 갖고 있다. 앵무조개(고생대와 중생대에 우글거렸던, 멸종한 암모나이트의 사촌)는 질적인 측면에서 편형동물과 인간의 중간에 해당하는 눈을 가지고 있다. 빛과 그늘을 감지하지만 상을 볼 수 없는 편형동물의 눈과는 달리, 앵무조개의 눈에는 상이 맺힌다. 하지만 그 상은 우리 눈에 맺히는 상과는 달리 뿌옇고 흐릿하다. 그 차이를 정확히 숫자로 표시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제정신이라면 이 무척추동물들의 눈과 다른 많은 동물들의 눈이 없는 것보다는 나으며, 그 눈들으 모두 앞서 언급한 완만한 산비탈에 죽 놓여 있다는 사실을(점진적이라는 뜻)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p190~191

도킨스가 생각하기에 환원불가능한 복잡성 개념의 가장 큰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진정으로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 발견된다면 Charles Darwin의 이론은 무너지겠지만, 마찬가지로 그것이 지적 설계론(Intelligent Design) 도 무너뜨리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사실 그것은 이미 지적 설계론을 붕괴시켰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말해왔고 앞으로도 말하겠지만, 우리가 신에 관해 아는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신이 환원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하리라는 점이기 때문이다! --p194

여담: The Mating Mind의 저자인 Geoffrey Miller는 자연선택에 의한 점진적 진화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형질(그는 이것을 "혁신의 문지방"이라고 부릅니다)의 진화를 설명할 수 있는 모델을 성선택(Sexual Selection)에 기반하여 제시하고 있습니다(The Mating Mind p250~270).

궁극적 보잉 747 (Ultimate Boeing 747 Gambit)

다음은 보잉 747 논증을 변형한 "궁극적 보잉 747 논증"의 요약입니다. 도킨스는 이 논증을 통해 "신이 없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장은 내 책의 핵심 논증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한 말을 또 하는 위험을 무릅쓰고서 그것을 여섯 가지로 요약하고자 한다.
  1. 여러 세기 동안 인간의 지성에 도전한 가장 큰 과제들 중 하나는 우주의 복잡하고 있을 법하지 않은 설계처럼 보이는 것이 어떻게 출현했는지 설명하는 것이었다.
  2. 설계처럼 보이는 것을 실제 설계로 보고 싶다는 유혹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시계 같은 인공물의 경우, 지적인 공학자가 설계자였다. 같은 논리를 눈이나 날개나 거미나 사람에게 적용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3. 그 유혹은 잘못된 것이다. 설계자 가설은 즉시 "설계자는 누가 설계했는가?"라는 더 큰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해결하고자 한 문제는 통계적 비개연성을 설명하라는 문제였다. 우리는 스카이훅이 아니라 기중기가 필요하다. 기중기만이 단순한 것에서 있을 법하지 않은 복잡한 것으로 점진적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4.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독창적이고 강력한 기중기는 자연선택을 통한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다. 다윈과 그의 후계자들은 경이로운 통계적 비개연성과, 설계된 듯한 모습을 한 생물들이 어떻게 단순한 것에서 시작하여 서서히 점진적으로 진화했는지 보여주었다. 현재 우리는 생물에게서 나타나는 설계라는 환각이 그저 환각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5. 우리는 아직 물리학에서는 상응하는 기중기를 찾지 못했다. 어떤 유형의 다중우주 이론이 생물학 분야의 다윈주의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이런 종류의 설명은 다윈주의에 비해 덜 만족스럽다. 행운을 더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본 원리는 한계가 있는 인간의 직관이 편안하게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행운을 가정할 수 있게 해준다.
  6. 우리는 생물학 분야의 다윈주의만큼이나 강력한 기중기가 물리학에서 나타나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설령 다윈주의와 맞먹는 아주 흡족한 기중기가 물리학 분야에는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비교적 약한 기중기들도 인본 원리의 부추김을 받으면 지적 설계자라는 자멸하는 스카이훅 가설보다 더 낫다.

이 장의 논증이 받아들여진다면, 종교의 실질적인 전제(신 가설 - God Hypothesis)는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p244~246
"확실하다"가 아니라 "거의 확실하다"인 이유는 2장에서 말한대로, 신 존재에 대한 확실한 부정(확률 스팩트럼의 7번)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번역본 표지 뒷면에는 "신이 없음을 입증했다"는 식으로 나와있는데, 과장입니다. 신이 없음을 입증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신론자들이 우쭐할 필요는 전혀 없는데, 신의 없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다고 해서 신이 있다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없음을 입증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신 뿐만 아니라, 도깨비, 귀신,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 등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지적으로 충실한 유신론자"가 되는 것은 "지적으로 충실한 무신론자"가 되는 것 보다 조금 더 힘든데, 왜냐하면 무신론자는 "신이 없음"을 입증하기 위한 노력만 하면 되지만 유신론자는 "신이 있음"과 더불어 그 신이 자신이 믿는 바로 그 신이라는 점 까지도 설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죠. 한편, 불가지론자는? 아주 쉽죠. :-)

대부분의 유신론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별 고민을 안할 것 같은데 왜냐하면 그들은 "지적으로 충실한 유신론자"가 되고 싶다기 보다 "영적으로 충실한 유신론자"가 되고 싶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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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논증들(Arguments for God's existence)

이 장의 주제는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논증들 중 유명한 것들을 나열하고 이를 하나씩 비판하는 것입니다. 다음 소제목들이 각각의 논증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 3.1. 토마스 아퀴나스의 "증명" (Thomas Aquinas' 'Proofs')
  • 3.2. 존재론적 논증과 연역적 논증들
          (The Ontological Argument and Other A Priori Arguments)
  • 3.3. 아름다움 논증 (Arguments from Beauty)
  • 3.4. 개인적 경험 논증 (The Argument from Personal 'Experience')
  • 3.5. 성서 논증 (The Argument from Scripture)
  • 3.6. 독실한 과학자 논증 (The Argument from Admired Religious Scientists)
  • 3.7. 파스칼의 내기 (Pascal's Wager)
이 중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읽은 몇 가지만 요약하도록 하겠습니다.

3.1. 토마스 아퀴나스의 "증명".

토마스 아퀴나스는 13세기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신학자 입니다. 그의 다섯 가지 신 존재 증명은 매우 잘 알려져 있습니다. (Quinquae viae 참고)
  1. 부동의 원동자. 그 어느 것도 선행 원동자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 무언가가 최초의 움직임을 일으켜야 하며, 우리는 그 무언가를 신이라 부른다.
  2. 원인 없는 원인. ... 모든 결과에는 그보다 앞선 원인이 있으며, ... 최초의 원인을 ... 신이라고 부른다.
  3. 우주론적 논증. ... 그 어떤 물체도 존재하지 않던 때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 물체들을 출현시킨 비물리적인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며, 우리는 그것을 신이라고 부른다.
  4. 정도 논증. 우리는 사물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안다. 말하자면 선이나 완벽성 같은 것에 정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최대값과 비교해야만 그 정도를 판단할 수 있다. 인간은 선하면서도 악할 수 있으므로, 최대 선은 우리 안에 있을 수가 없다. ... 우리는 그 최대값을 신이라고 한다.
  5. 목적론적 논증 또는 설계 논증. 세계의 사물들, 특히 살아 있는 것들은 마치 설계된 듯이 보인다. ... 따라서 설계자가 있는 것이 분명하며, 우리는 그를 신이라고 부른다.
다음은 처음 세 개의 논증에 대한 비판입니다(덤으로, 전지와 전능이 양립불가능함을 간단히 덧붙이고 있습니다):
처음 세 개의 증명은 같은 것을 그저 달리 말한 것으로 하나로 묶어서 생각할 수 있다. (...omitted...) 회귀 개념에 의존하는 이 세 가지 논증은 신을 불러내 회귀를 종식시킨다. 그것들은 신 자신이 회귀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전적으로 부당한 가정을 한다. 비록 우리가 무한 회귀의 종식자를 독단적으로 생각해낸 뒤, 단순히 이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거기에 이름을 붙이는 수상쩍은 사치를 부린다고 하더라도, 그 종식자에게 일반적인 신의 속성들을 부여할 이유는 전혀 없다. 전능, 전지, 덕, 창조적인 설계도 그렇고, 기도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죄를 용서하고 가장 내밀한 생각을 읽는 등의 인간적인 속성들은 말할 것도 없다.

말이 난 김에 덧붙이면, 논리학자들은 전능과 전지가 상호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신이 전지하다면, 그는 자신이 전능을 발휘하여 역사의 경로에 개입하여 어떻게 바꿀지를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개입하겠다고 이미 마음먹은 것을 바꿀 수 없다는 의미며, 따라서 그가 전능하지 않다는 뜻이다.

--p122~123
즉, 백번 양보해서 그것이 "신"이라고 인정해봤자 그 "신"이 기독교 등의 종교에서 말하는 인격신이라는 것까지 자동으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다음은 정도 논증에 대한 비판입니다. 사실 정도 논증은 한 눈에 보기에도 상당히 어설픕니다. 도킨스도 짧게 언급하기만 합니다:
이것이 논증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이런 말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냄새가 다르지만,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 완벽한 최대 냄새를 참조해야만 서로의 냄새를 비교할 수 있다. 따라서 비할 수 없을 만큼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우리는 그를 신이라고 부른다고. 비교할 특성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도, 마찬가지로 아둔한 결론이 도출된다. --p125
마지막으로, 목적론적 논증 또는 설계 논증에 대해서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할 말이 많은 사람 중 한 명이 도킨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이미 20여년 전에 설계 논증의 반박을 주제로 책을 한 권 냈었는데 바로 "눈 먼 시계공(The Blind Watchmaker)" 입니다. 그는 이번에도 여전히 할 말이 많은지, 설계 논증에 대해서는 다음 장(제4장)을 통으로 할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3장에서는 일단 패스.

3.5. 성서 논증.

성서 논증은 한 마디로 성경을 근거로 한 논증들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잖아"라는 형태인거죠. 성서에 대한 도킨스의 견해는 간단합니다:
Dan Brown의 소설 다빈치 코드와 그것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기독교계에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기독교인들은 영화 상영에 반대하고 상영관 앞에서 시위를 벌인다. 그 작품은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허구다. 즉 창작된 소설이다. 그 점에서 그것은 복음서들과 똑같다. 다빈치 코드와 복음서들의 유일한 차이점은 복음서들이 오래된 소설인 반면, 다빈치 코드는 현대 소설이라는 것뿐이다. --p154
그는 성서 논증을 비판하기 위해 성서의 다양한 오류들을 제시합니다. 그는 또 Bart Erhman의 책 "Misquoting Jesus"를 추천하고 있는데, 이 책은 국내에서 "성경 왜곡의 역사: 누가, 왜 성경을 왜곡하였는가"라는 제목으로 번역/출판되었습니다. 성서 논증에 대한 비판은 도킨스를 인용하는 것 보다는 "성경 왜곡의 역사"라는 책을 요약하면서 나중에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Bart Erhman에 대해서는 예전에 "예수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 증거가 있는가?"라는 글에서 간단히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3.6. 독실한 과학자 논증.

독실한 과학자 논증은 소위 이런 것이죠:
뉴튼은 종교인이었다. 당신은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자신이 뉴턴, 갈릴레오, 케플러 등보다 뛰어난 사람이라고 자신하는가? 그런 위인들이 신을 선호한다면, 당신도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닌가? --p155
이런 종류의 논증(사실 의미있는 논증이 아닙니다만)을 펼치는 사람들은 종종 사실을 왜곡하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다윈이 죽기 직전에 신앙 고백을 했다거나 하는 종류의 소설이 유명합니다. 도킨스는 이런 소설의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임종 때 녹음기를 준비해두어야겠다는 말도 하고 있습니다 --;

이 섹션의 주된 내용은 거의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종교를 갖고 있지 않으며, 뛰어난 과학자들은 특히 그러한 경향이 높더라는 것입니다:
1996년 나는 Human Genome Project의 창시자이자 내 친구인 James Watson과 예전에 그가 체류했던 케이브리지 대학교 클레어 대학의 교정에서 대담을 나누었다. (...omitted...) 나는 왓슷에게 현재 종교인 과학자를 많이 알고 있는지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거의 없어요. 가끔 그런 사람을 만나면 약간 당혹스럽습니다(웃음). 알다시피 나는 계시를 통해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믿을수가 없거든요."

왓슨과 함께 유전학 혁명을 일으킨 Francis Crick은 케임브리지 대학교 처칠 대학이 성당을 짓겠다고 하자 그 대학의 평의원직을 사임했다.

(...omitted...)

1998 년 E.J. Larson과 L. Witham이 학술지인 네이처지에 실은 글에는 (영국의 왕립학회 회원에 상응하는) 미국 국립 과학 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될 정도로 저명한 미국 과학자들 중에 인격신을 믿는 사람이 약 7%에 불과하다고 나와 있다. 무신론자의 이 압도적인 우위는 90% 이상이 일종의 초자연적인 존재를 믿는다는 미국 대중의 전반적인 입장과는 거의 상반된 것이다.

(...omitted...)

이 책이 인쇄될 무렵, 내 동료인 Elisabeth Cornwell과 Michael Stirrat은 왕립학회 회원들(FRS)의 종교적 견해를 조사한, 비슷하지만 더 철저한 연구 결과를 소개했다. (...omitted...) 미국 학자들의 압도적 다수가 그러하듯이, FRS에서도 무신론자가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한다. 회원들 중 겨우 3.3% 만이 인격신이 존재한다는 지문에 강력하게 동의한 반면, 78.8% 는 강하게 부인했다.

--p158~162

3.7. 파스칼의 내기

파스칼의 내기란 이런 것입니다:
위대한 프랑스 수학자 Blaise Pascal은 신이 존재할 확률이 아무리 낮다고 해도, 잘못 추정했을 때 닥칠 대가가 훨씬 더 크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신을 믿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이었다. --p164

이것도 상당히 우스운 주장 중 하나입니다. 여러가지 비판이 가능하겠지만, 다음 한 단락이면 충분합니다:
당신이 죽어서 대면한 신이 바알이라고 가정하고, 바알이 옛 경쟁자인 야훼처럼 다른 신을 믿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해보자. 파스칼은 엉뚱한 신을 믿기보다는 차라리 신이 없다는 쪽에 내기를 걸지 않았을까? 사실 내기를 걸 만한 신과 여신의 가능한 수는 파스칼의 논리 전체를 무위로 만들지 않을까?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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