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결정론자(혹은 기계론자)입니다.
그냥 이렇게만 얘기하면 "19 세기도 아닌데 왠 기계론?"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셔서... 제 생각을 한번 글로 정리해봤어요. 지적으로 충실한 결정론자(도킨스의 표현인 "지적으로 충실한 무신론자"에서 따왔습니다)가 되려면 "양자역학을 근거로 한 반론"과 "복잡계를 근거로 한 반론"을 방어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엄한 내용이 있으면 사소한 부분이라도 지적해주세요. 감사합니다.)
1. 양자역학을 근거로 한 반론양자역학에서 다루는 현상의 일부는 관측된 결과를 규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를 근거로 하여 세상은 규칙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양자역학을 근거로 한 반론입니다.
이 반론을 방어하기 위해 John Searle의 중국인방 논증(
Chinese Room Argument) 형식을 따와서 제 마음대로 "수학자 방 논증"이라는 것을 만들어봤어요.
Version 1:
- 방 안에 수학자가 있다. 수학자는 방 밖을 볼 수 없다.
- 수학자가 방문을 두드리면 문틈을 통해 숫자가 적힌 종이가 한 장 씩 제시된다.
- 수학자는 방 밖을 보지 않고서 그 숫자들이 미리 정의된 계산(알고리즘)에 의해 생성되는 것인지, 비결정론적으로(nondeterministic) 제시되는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가?
Version 2:
- 방 밖에 수학자 있다. 수학자는 방 안을 볼 수 없다.
- 수학자가 방문을 두드리면 문틈을 통해 숫자가 적힌 종이가 한 장 씩 제시된다.
- 수학자는 방 안을 보지 않고서 그 숫자들이 미리 정의된 계산(알고리즘)에 의해 생성되는 것인지, 비결정론적으로(nondeterministic) 제시되는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가?
주어진 시스템을 외부에서 아무리 오래 관찰해도 그 시스템을 환원적으로 분석해보기 전에는 시스템이 결정론적으로 작동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수열이 2,3,5,7,11,13,17,19 식으로 주어진다면 수학자는 이 시스템이 소수(prime number)를 하나씩 제시하고 있다는 강한 심증을 갖을 수는 있지만, 결코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19 다음에 갑자기 22가 나올 지도 모르니까요.
반대로 시스템이 불규칙적이거나 통계적으로 임의적인 결과를 보여준다고 해도 이 시스템이비결정론적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기 P가 굉장히 긴 주기함수(
periodic function)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혹은 Wolfram의 Rule 110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단순한 turing complete automaton)처럼 간단한 규칙을 따르지만 매우 복잡한 패턴을 보여주는 세포자동자(Cellular Automata)의 최신 상태를 자연수로 변환한 결과를 내보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주어진 시스템이 수학과 같은 추상적 시스템이 아니라 물리적 실체라고 해도 마찬가지 입니다.
Version 3
- 물리학자가 어떤 물리적 대상을 관찰하고 있다.
- 물리학자는 원하는 자신이 횟수만큼 그 대상을 관찰하여 물리량을 얻어낼 수 있다.
- 물리학자는 환원적으로 그 대상의 내부를 분석하지 않고서 물리량이 규칙적으로 변화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할 수 있는가?
Version 3의 물리학자는 Version 1의 수학자와 마찬가지로 주어진 시스템(시공간) 안에 갖힌 상태에서 시스템의 물리량을 측정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해당 시스템이 결정론적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따라서, 양자역학에서 다루는 현상의 일부가 임의적으로 보이거나, 결정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어 보인다고 해서 시공간이 비결정론적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습니다.
2. 복잡계를 근거로 한 반론초기값의 아주 작은 차이가 결국에는 굉장히 큰 차이를 만들어내는(초기치 민감성 혹은 나비 효과) 몇몇 비선형 체계들(chaos)도 "결정론" 혹은 "기계론"에 반대하는 근거로 종종 언급됩니다.
하지만 chaos system은 비결정성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deterministic chaos). 결정론적 시스템도 초기치 민감성과 같이 chaotic한 특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뻐서 유명한? ㅎㅎ) Lorenz attractor
3. 그렇다면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나?양자역학이나 복잡계에 대해 어디선가 주워들은 21세기의 결정론자(접니다 --;)는 19세기 결정론자들 보다는 상당히 겸손해서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는 망언을 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결정론적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1) 측정의 한계로 인한 오차, 2) 초기치 민감성으로 인한 오차의 비약적 증폭, 3) 계산 상의 한계(윈도 XP - 호스트 - 에서 VMWare로 띄운 윈도 XP가 호스트 보다 빠를 수는 없는 법) 등 각종 제약으로 인하여 엄밀한 의미에서의 예측이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4. 결론양자역학이나 복잡계 이론은 결정론을 반대하는 근거로 쓰일 수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결정론이 사실이라는 결론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고, 그런 결론을 얻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닙니다. 저는 (강한) 불가지론자라서 결정론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고 믿습니다. 다만 결정론도 충분히 합리적인 철학적 입장이라는 말이 하고 싶은 것이죠.
제가 결정론을 선호하는 이유는 그것이 더 경제적이기 때문입니다. "우연"이라고 하는 불필요한 요소가 존재한다고 가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오캄의 면도날). 물론 설명 혹은 이해의 편의성을 위해 어떠한 현상을 "우연" 혹은 "임의적"이라고 가정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편의를 위한 가정은 말 그대로 가정일 뿐입니다. 이를테면 엄연한 물리학적 법칙에 의해 설명되는 현상이지만 화학 수준에서는 편의를 위해 임의적이라고 가정할 수 있고, 화학 법칙에 의해 설명되는 현상을 생물학 수준에서는 편의를 위해 임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죠.
이런 이유로 저는 결정론자 입니다. :-)
Comments
저 같은 경우- 과거가 단선적이라는 것을 믿사오며,
미래에는 현재도 과거의 한 시점이 될 것을 믿사오니,
어찌 결정론자가 아니될 수 있겠습니까.
음. 그렇게 짧게도 되는군요 ㅎ (안녕하세요? 블로그 잘 읽고 있습니다 ^^)
잘 읽었습니다. 재미있는 주제네요. 그런데 '양자역학을 근거로 한 반론'에 대한 반론의 근거로 제시하신 '수학자 방 논증'은 불가지론을 설명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논증이 양자역학의 반론에 대한 반론이 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을 써보겠습니다. 양자역학의 기본 원리인 불확정성 원리가 입자 각각의 위치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주지 못하게 하더라도 입자의 위치에 관한 확률분포에 대해서는 정확한 정보를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입자 각각이 어디로 움직일지는 몰라도 입자의 확률분포는 결정론적으로 변화한다는 생각입니다. (슈뢰딩거 방정식이 바로 확률분포의 변화에 관한 방정식이죠.) 이렇게 결정론 입장에서 한발 물러선다고 해도 결정론이 크게 타격받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복잡계를 근거로 한 반론'에 대한 반론에 대해서는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참고가 될까 하여 제 글을 트랙백으로 걸겠습니다.
1. 좋은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 트랙백 걸어주신 글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에.. 제가 수학자 방 논증을 통해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양자역학 반론이 잘못되었으니 결정론이 맞다'
가 아니라,
'양자역학을 근거로 한 반론이 잘못되었으니 여전히 불가지론을 취할 수 있고, 21세기에 여전히 결정론을 주장하는 것도 합리적 입장 중 하나이다'
입니다. 사실 저는 물리학을 잘 몰라서 "한발 물러선다고 해도 결정론이 크게 타격받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어요. 지금도 낙타님이 그렇가 말씀을 하시니까 그냥 아 그런갑다하고 '믿는 것'이지 제가 이해한 것은 아닌 애매한 상황입니다. ㅎㅎ
제가 이해하고 있는 것들만을 바탕으로 결정론을 안전하게 주장하려면 '물리적 실체가 결정론에 반하는 것 같은 그 어떠한 현상을 보여주더라도' 그 현상이 결정론을 부정하는근거로 쓰일 수는 없음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수학자 방 논증은 그런 의미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죄송하지만 낙타님이 댓글 삭제하셨었나요? 제가 스팸 지우다가 실수로 같이 지웠나 싶어서 일단 다시 살려놓았는데, 일부러 지우신거면 그냥 다시 지워주세요 ^^;;;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ㅋㅋ
제 덧글에 대한 강애란님(^^)의 덧글에 대한 덧글을 달겠습니다. 우선 저도 '양자역학 반론이 잘못되었으니 결정론이 맞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수학자가 방문 밖에서 들어온 숫자들을 분석하여 결정론적인지 아닌지를 밝혀낼 방법은 애초에 없으며, '방 밖의 메커니즘을 알 수 없다'는 면에서 불가지론을 옹호할 뿐인 것 같습니다. 불가지론을 옹호한 상태에서 결정론이냐 아니냐를 판단할 수는 없으므로, 즉 결정론 여부와는 무관한 것이므로, 양자역학 반론에 대한 반론으로 부적절해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프랙탈 이군요. 옛 기억이...
ㅎㅎ 프랙탈에 대한 추억이라도?
결정론과 비결정론. 그리고 자유의지에 대해서 여기저기 자료를 찾다가, 저랑 비슷한 생각을 가진 글을 만나게 되어서 반갑네요 ^^ 벌써 오래전의 글이지만;; 반가움에 리플 달고 갑니다. 요즘 대니얼 데닛의 '자유는 진화한다'를 읽고 있는데, 이건 도킨스에 비해서 너무 수준이 떨어지는 거 같네요;;
그런가요? 저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전 데닛도 매우 좋아하는 편이라, 어쨌건 읽어보긴 해야할 것 같아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