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블로그에 썼던 글인데 옮겨왔습니다)

저는 불가지론자 입니다.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에서 자신은 불가지론자가 아니라 무신론자임을 밝히면서, 불가지론자를 무신론자로 개종시키기 위해 한 장(chapter)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저는 책을 읽고 나서도 여전히 불가지론자로 남아 있는데 그 이유를 간략히 적어보았습니다.

도킨스는 불가지론을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나는 먼저 불가지론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자 한다. TAP 즉, 실질상의 일시적 불가지론(Temporary Agnosticism in Practice) 은 이쪽 아니면 저쪽이라는 명확한 답이 실제로 있지만 아직 거기에 도달할 증거가 부족할 때(또는 그 증거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증거를 살펴볼 시간이 없을 때) 취하는, 합리적인 중도적 입장이다. TAP는 페름기 절멸을 대하는 합당한 입장일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그것을 알 수 있겠지만, 당분간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취하는 중도 입장도 있다. 나는 그것을 PAP(Permanent Agnosticism in Principle: 원리상의 영구적 불가지론)라고 부르고자 한다. (...omitted...) PAP 형태의 불가지론은 우리가 아무리 증거를 모은다 해도 증거라는 개념 자체를 적용할 수 없기에 답을 결코 얻을 수 없는 질문들에 알맞다. 그런 질문은 증거가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 다른 평면 혹은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 "당신과 내가 바라보는 빨강이 똑같은 빨강인가?" (Qualia, The Problem of Other Minds 등 참고) 라는 질문 같은 철학적 재담이 그런 사례에 속할 것이다.

--p78~79

저는 불가지론자이자 주관적 관념론자(subjective idealist)이기도 한데, 주관적 관념론의 입장에서 이러한 구분은 무의미합니다. 도킨스는 명확한 과학적 근거가 주어지면 이를 통해 인간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지만, 사실 과학적 근거라는 것은 감각을 통해 인식된 주관적 관념일 뿐이고 그가 "안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안다고 믿는 것"에 불과합니다.

주관적 관념론자가 볼 때 과학적 방법론(scientific methods)이란 "진실 혹은 진리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가 아닙니다. 과학적 방법론은 그저 "내적 일관성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관념들을 끌어모으기 위한 도구"일 뿐이고, 이렇게 수집된 관념의 체계(과학적 지식의 총체)는 (수학 만큼이나) 객관적 세상에 대한 대응물이 전혀 아닙니다. 따라서 과학이란 수학에 비해 내적 일관성이 크게 떨어지는 엉성한 관념 덩어리일 뿐입니다.

여기까지만 얘기하면 불필요한 오해를 사게 될 것 같아서 조금 부연하겠습니다. 내적 일관성을 기준으로 종교,과학,수학을 선분 위에 늘어 놓는다면 종교과 수학이 양 끝을 차지하고 과학은 수학 아주 가까이에 붙어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과학은 종교(혹은 각종 포스트모던 찌끄러기 등)에 비해 한없이 일관성이 높은 관념 체계입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 주관적 관념론자이고,
  • 따라서 과학이건 종교이건 그 무엇이건간에 우리가 진실로 "알 수 있는 것"이란 없다고 믿으며,
  • 따라서 신 존재 뿐 아니라 모든 문제에 대하여 불가지론자이며(강한 불가지론),
  •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에 비해 과학이 한없이 유용한 관념 체계라고(내적 일관성의 측면에서)
생각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사족입니다)

문제는 주관적 관념론이 논리적으로(혹은 철학적으로) 아무리 타당하다고 해도 실상활에서는 도무지 써먹을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It(solipsism) may be the most logical view to hold but it makes communication of ideas difficult. --Alan Turing, 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
주관적 관념론(혹은 유아론 - 이 둘은 서로 다르지만 문맥상 통하므로)을 실천하면서 살자면 마냥 아무 일도 안하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굶어 죽어야 하겠지만 물론 그럴 수는 없습니다. :-) 즉, 실생활에 있어서는 적어도 프라임론(응?)이 주관적 관념론 보다는 훨씬 유용합니다.

이를 다시 신 문제에 대입해보면 이렇게 됩니다: 저는 비록 불가지론자이지만 무신론자 행세를 할 것이며, 과학적 방법론을 종교처럼 믿으며 살아갈 것입니다. :-)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인데, 러셀도 저 태어나기 한참 전에 비슷한 이야기를 했더군요:
I never know whether I should say "Agnostic" or whether I should say "Atheist". It is a very difficult question and I daresay that some of you have been troubled by it. As a philosopher, if I were speaking to a purely philosophic audience I should say that I ought to describe myself as an Agnostic, because I do not think that there is a conclusive argument by which one prove that there is not a God.

On the other hand, if I am to convey the right impression to the ordinary man in the street I think I ought to say that I am an Atheist, because when I say that I cannot prove that there is not a God, I ought to add equally that I cannot prove that there are not the Homeric gods.

--Am I An Atheist Or An Agnos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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