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개발자 좀 살려주세요라는 캠페인이 시작되었습니다.
버그도 많고 웹표준도 잘 따르지 않는 오래된 브라우저(대표적으로 IE6)를 최신 브라우저로 업그레이드 하자는 내용입니다. 웹 표준도 지키면서 예전 브라우저에서도 잘 작동하도록 하려다보니 개발자들이 너무 힘들다는 것이죠.
제목이나 내용이 사용자 보다 개발자의 입장에 치우쳤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약하지만 목적 자체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웹 표준을 잘 지키는 브라우저의 점유율이 높아지면 사용자나 개발자는 물론이고 장기적으로는 웹을 둘러싼 생태계 전체가 이득을 봅니다. 그래서 저도 블로그 우상단에 배너를 달았습니다.
대부분은 목적에 공감하며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시는 것 같은데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계신 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이런 글을 읽었는데요:
제가 좋아하는 업체(저랑 아무런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그냥 좋아합니다. 배울 점이 참 많은 것 같아요)에서 선정한 추천 블로거이기도 하고, 댓글이나 트랙백도 많이 달리고 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영향력 있는 분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좀 자세히 읽어보았습니다.
1. 개발자가 잘못해서 이렇게 된건데, 이제와서 사용자탓?
사람들이 ie6을 많이 사용하는 것은 그동안 개발자들의 편의주의 등이 누적되어온 결과입니다. 개발자들을 위해서 소비자들이 업그레이드를 해야 하는지는 솔직히 맘에 안 드는 구석이 많습니다.
개발자 편의주의 때문에 IE6의 점유율이 높은 것이라는 주장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주장의 진위여부와 이 캠페인의 가치와는 논리적으로 별 상관 관계가 없다는 것이죠.
개발자가 저질러서 이렇게 됐건 아니건 간에 업그레이드를 하면 개발자 뿐 아니라 사용자에게도 득이 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독점 규제, 경쟁 촉진은 사용자의 권익을 위한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위 글을 쓰신 작은인장님도 서두에 밝히신 바 있죠.
ie6가 표준도 안 따르고, 보안에 취약하기도 하고 버그도 산재하는 등 사용자와 개발자에게 안 좋은 것은 분명합니다.
한편, 감정적으로는 이해할만한 반응일까요? 전 이 부분도 모호하다고 봅니다. "개발자들이 저질러놓고 이제와서 개발자들이 불편하니까 사용자한테 업그레이드 하라고?" 라는 반응이 감정적으로나마 납득할만 하려면 브라우저를 업그레이드했을 때 사용자가 얻는 이득에 비해 개발자가 얻는 이득이 커야 합니다. 적어도, 개발자가 손해는 안봐야죠. 그래야지 "지들 좋으려고..." 하는 생각을 품어보죠.
하지만 제가 보기엔 개발자는 단기적인 손해를 감수하고 이 캠페인을 하고 있습니다. 그 손해란 자신들의 노하우를 잃는 것입니다. 웹 표준을 따르는 개발이란 원래 쉬운 것입니다. 하지만 IE6가 있기 때문에 웹 표준을 따르는 개발이 어려워지고(웹 표준도 따르면서 IE6에서도 잘 작동해야하니까), 일이 어려우면 그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적어지고, 그러면 그 노하우를 알고 있는 사람들 몸값이 올라가죠. (제 경험에 의하면 최근 몇 년 사이 웹 표준 관련 기술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었고, 대우도 훨씬 좋아졌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개발자들은 나름의 사명감을 가지고 캠페인을 하는 것입니다(이런 의미에서도 캠페인의 제목과 본문을 좀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2. 개발자가 저질렀나?
98년 99년 쯤, IE4.0 을 기준으로 서서히 IE 점유율이 높아지면서 1차 브라우저 전쟁이 끝나버렸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습니다. NN의 유료화 시도(얘들은 돈이 없었죠), MS의 IE 끼워팔기, IE의 더 높은 표준 수용율(당시엔 그랬더랬죠) 등등. IE 나쁘고 NN 좋다 뭐 이런 얘기 하려는거 아닙니다. NN도 한참 잘나갈 때 모질라 확장 DTD 입네 뭐입네 하는걸 만들었더랬죠. (그래서 "표준에 기반한 경쟁"이 중요한 것입니다)
2.1. 첫번째 타겟. 정책 결정할 때 조언을 잘못한 기술자들?
한국의 경우는 공인인증서 문제도 사태를 거들고 있죠. 뭐 이 문제에 대해서도 개발자에게 굳이 책임을 넘겨보려 한다면 이런 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정부에서 정책 결정 할 때 기술 위원회 같은 것을 두고 조언을 구했을터인데 그 사람들이(결국 개발자라면 개발자) 잘못했으니 은행이나 공공기관에서 ActiveX 도배를 하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저야 뒷 얘긴 잘 모르니)
공인전자서명인증체계 기술규격을 살펴보자면 국내에서 독자 개발한 SEED를 강요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ActiveX를 강요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이 문제를 얘기할때 보통 SEED가 어쩌고 ActiveX가 어쩌고, 규제가 풀렸네 말았네 하는데, 사실 별 상관이 없는 말들입니다.
뭐 이렇게 변명(?)해봐도 문제가 없다곤 못하죠. 문제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이 캠페인과 단기적으로는 큰 관련이 없고(ActiveX 문제라면
여길 참고하세요. 또
이런 글들도 참고하세요), 이 캠페인을 하고 있는 분들이 '개발자의 원죄' 같은 소리를 들을 일도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네요.
2.2. 두번째 타겟. 정부/은행 프로젝트 SI 하는 개발자들?
작은인장님의 두 번째 글을 보면:
은행 사이트가 ActiveX로 도배질되는 것은 개발자 탓이군요. ㅎㅎ 정부기관의 웹사이트도 결국 외주로 만들어지는 것이고 (새로 구축되는 사이트들마져 ActiveX로 도배되는 것을 고려할 때) 개발자들의 변명은 더이상 설득력이 없다고 보여집니다. 이런 캠페인을 벌이기 전에 정부를 설득해서 ActiveX를 사용하지 않도록 만들어야죠.
이런 말이 나오는데요, 정부 프로젝트에 투입된 SI 인력들이 행여 ActiveX가 아닌 자바 기반으로 모듈을 만들어봤자 사이트에 적용할 수가 없습니다. 전자서명법에 의하면 공인인증서 모듈은 정보통신부 장관의 인가를 받지 않은 개인이나 업체가 만들어봐야 적용할 수 없거든요.
2.3. 세번째 타겟. 인증 솔루션 업체의 개발자들?
이제 SI 하는 개발자들이 아니라 이니텍이니 퓨처니 하는 업체의 개발자들이 솔루션을 ActiveX 기반으로 개발한 것이 문제라고 말할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이것도 따져보자면 기술 논리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시장 논리에 의한 것이죠. 브라우저가 이미 IE 뿐인데 뭐하러 자바(IE에서는 JDK 1.1에서 지원을 멈췄고 그나마도 Sun과의 법적 분쟁으로 VM을 넣니 빼니 말이 많았죠)나 플래시(99년 당시면 Flash 3 혹은 4 정도 있을 시절인데 당시에 플래시를 이런 용도로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누군가가 생각했다면 대단한 선지자)를 사용하겠어요.
그리고 아마도 이 또한 시장논리에 따르는 것이겠지만, 위 솔루션 업체 중 비 ActiveX 기반 모듈을 제공하는 업체 또한 있습니다. 뭐 논의랑 별 상관 없는 것 같지만 혹시 위 업체에 속한 개발자 분이 보시면 섭섭하실까 싶어서.
2.4. 그럼 누구?
개발자 중심적인 시각이라고 자꾸 말씀하시는데, 사실 정말 개발자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계신 분은 작은인장님이 아닌가 싶습니다. 개발자들이 완전히 떳떳하고 잘못 하나 없다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개발자만 열심히 잘 한다고 해서 기술적인 문제들이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개발자들이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죠. 그래서 이런 캠페인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상황이 이런데 문제를 개발자에게만 돌리려 하면 올바른 논거를 찾을 수 없을겁니다.
3. 개발자가 먼저 표준 준수를 위한 노력을 해라?
웹표준에 맞는 웹페이지를 제작한 뒤에 이런 캠페인을 해 주십시오. 사용자들이 움직이면 개발자들도 그에 맞는 웹페이지를 만들겠다는 건 너무 개발자 편의주의 아닙니까?
이 캠페인을 시작하신 분들이나 참여하고 계신 분들이나(제가 아는 분도 있고 모르는 분도 있고 합니다만 아는 분들에 한해서 말씀드리자면) 이미 표준 준수를 위한 많은 노력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사실은 이 캠페인 자체가 그 노력의 일환이라는 것이죠.
근본 원인을 따져봅시다. 개발자는 왜 표준 준수를 안할까요? 시장에서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걸 누가 판단할까요? 기술 관련 부서 보다는 비즈니스 관련 부서에서 판단합니다. 어떻게 판단할까요? 브라우저의 시장 점유율을 보고 판단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개발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대충 나열해보면
- 첫째, 주어진 작업 기간을 크게 늘리지 않으면서도 과거 브라우저와 표준 브라우저에서 모두 작동하는 페이지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한다. 이게 참 힘든 일이지만 많은 분들이 이렇게 하고 있죠. 하지만 일정 압박이 오기 시작하면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일.
- 둘째, 의사결정권자들이나 비개발직군 사람들에게 웹 표준의 경제적 가치를 지속적으로 알린다.
- 셋째, 최종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캠페인을 벌인다. 바로 이 캠페인 같은 것입니다.
- 넷째, 웹표준 적용을 막는 정책적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
등등이 있겠습니다. 이미 여러 분야에서 여러 종류의 개발자들이 이런 일들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개발자가 먼저 해라, 그럼 사용자도 하겠다"는 주장은 개발자/사용자를 양분하여 경쟁구도를 만드는 발상인데, 대체 이렇게 하면 누구에게 이로운건가요.
4. 결론
그래도 이런 논란에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논란 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캠페인이 알려진다면 좋은 일이죠. 논쟁을 하는 당사자들이야 뭐 상대방에게 설득 당할 일이 없겠으나( 항상 그렇죠 --; ), 다른 분들은 각자 알아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그래봤자 이 좁고 좁은 블로고스피어에서 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 아쉽긴 하죠. 이런 종류의 캠페인이 블로고스피어를 벗어나서도 널리 전파될 수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Mass Interpersonal Persuasion 같은 것을 좀 더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